하늘을 향한 마음/마음을 열고

80 대 20

주님의 착한 종 2005. 6. 10. 08:49
 

언젠가 잡지에서

레이건 前 미국 대통령과 그의 아내 낸시 여사의 사랑 이야기를 읽었는데,

인상적인 구절이 있었습니다.

영화 배우였던 두 사람은 1952년 결혼한 이래 한평생 서로를 아기자기하게 사랑했고,

「역대 백악관 주인 중 최고의 커플」로 꼽혀 왔는데,

그들의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낸시는 결혼이 50대 50의 파트너십이라고 생각지 않고,

느 쪽이든 상대를 위해 80을 줄 수 있는 80대 20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물론 낸시는 자신이 80을 주려고 노력했고,

치매에 걸린 남편을 헌신적으로 보살피고 있다고 합니다.

 

백악관 시절 그들 부부의 다정한 모습이나 레이건의 명 연설 등은

왠지 영화 장면 같아서 친밀감을 못 느꼈는데,

치매에 대처하는 노년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란 (특히 결혼이란) 평등한 관계여야 하며,

50개 50의 파트너십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너에게 줬으니 너도 그만큼 달라는 생각,

내가 더 주는 것은 손해 정도가 아니라 자존심 문제라는 생각 등이

모든 사랑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습니다.

 

젊은이들만이 아닙니다.

자녀를 결혼시킨 부모들은 사랑하는 아들딸이

일방적으로 손해볼까봐 노심초사합니다.

"그래 네가 잘 졌다. 때로는 지는 게 이기는 거란다.

 부부 관계가 순탄하려면 마음을 넓게 가져야 한다."고 타이르는 부모는 적고,

 

"네가 무슨 죄졌니? 아니면 병신이냐?

초장에 버릇 잡지 못하면 평생 고생이니 알아서 해라."라고

펄펄 뛰는 부모는 많다고 합니다.

 

연인 사이, 부모 사이만 팽팽한 가요?

요즘에는 부모 자식 사이도 팽팽하답니다.

피차에 조금도 양보를 안하고 끝까지 싸우거나,

어느 한 쪽이 토라져 몇 주씩 말을 안 하는 부모와 자녀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또래 친구 사이보다 더 경쟁적이고 대립적인 모녀 관계도 있다고 합니다.

자녀 수가 적어 부모 자식 관계가 지나치게 밀접해지고,

愛憎(애증)의 표현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사랑에서 가장 크게, 결정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50대 50을 따지지 않고 80을 주겠다는 푸근한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왜 나 자신은 손해보지 않겠다는 강박관념의 노예가 되었을까?

각자 사랑의 팽팽한 줄을 조금씩 늦춘다면,

내가 80을 주겠다고 마음먹는다면,

80을 주는 사람이 더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들 사이의 고통은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나는 과연 적어도 아내와 딸들에게만큼은 80 : 20의 관계를 유지해 왔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절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내는 결정적인 순간에 99를 주어버립니다.

특히 내게 말입니다.

 

앞으로 언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한 20년이나 될까요...

우리가 부부로 살아온 시간만큼 밖에 남지 않았네요.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이지만 아내에게 만큼은 80을 주려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