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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3월02일)

주님의 착한 종 2022. 3. 2. 05:43

오늘의 묵상(2022년03월02일)

 

 

반갑습니다.

거의 열흘 만에 다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먼저 송구스러운 말씀을 전합니다.

 

제가 매일 미사의 독서와 복음들에 대한

묵상 글을 올려드리고 있었는데

다음카카오에서 제 글의 일부 내용이

"청소년 유해정보"라며

제 아이디를 삭제시켜 DAUM에 접속을 못하게 하는

초처를 감행했습니다.

아니, 성경 묵상 글이 청소년 유해 정보라니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것과 별도로,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 같은

이른바 개신교에서 이단이라고 못 박은

신흥종교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을

요약하여 올리거나

일부 거대 교회 목회자들의 사치와 탈선에 대해서도

비판의 글을 여러 번 올렸었는데

그때마다 제 글을 모니터링하는 단체나 개인이 있는지

명예훼손 등으로 신고를 하였던 적이 많았습니다.

 

다음카카오에서 담당자들이 당연히

그 내용을 확인하여 명예훼손의 여부를 판별하겠거니

하는 생각도 있고 또 일일이 대응하기 싫어 무대응을 하였더니

그런 것들이 모두 누적 벌점으로 합쳐져

결국 접근금지를 당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성경 묵상 글이 청소년 유해 정보라니요..

사법 대응도 감수하겠다는 심정으로

계속 다음카카오에 수 차 이의를 제기하였고

결국 인정을 받게 되어

다시 사용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귀찮더라도 저의 글에 대해

시비를 거는 단체나 인간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주시며

격려의 글과 기도를 하여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아무튼 다시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사순시기 

복되게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랜 만에 묵상 글을 쓰려니 조금 떨리네요.

오늘 복음은 마태오 6,1-6.16-18 입니다.

 

 

몇 년 전에 전국 성지 순례길에

대구 대교구청의 묘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묘지 입구 왼쪽에는 Hodie mihi

오른 쪽에는 Cras tibi 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저게 무슨 뜻일까?

메모를 하여 집에 돌아와 찾아보았지요.

 

그 뜻은

 ‘Hodie mihi 오늘은 나, Cras tibi 내일은 너’

라는 말이더군요.

 ‘오늘은 내가 죽지만, 내일은 네가 죽는다’

 

오늘 이 자리에 누워있는 나뿐만 아니라

내 묘지 앞에서 멀쩡하게 살아 있는 당신도

머지않아 곧 죽는다는 해석이랍니다.

 

참말로 얄밉게 들릴 수 있는 말입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까

아등바등 애타게 살지 마라”는 식은

허무하기도 합니다.

해석이야 각자의 마음에 달려 있지만,

묘지 앞의 그 글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내가 내일도 살아 있을까?

아니면 죽어 있을까?”
확률로 따지면 저는 살아 있을 확률이 높겠지만

그것은 내 바람일 뿐이겠지요.

아무리 간절히 피하려고 애써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마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아닐까요?

 

 

우리는 살면서 죽음에 관해서는

대부분 두 눈에 붕대를 감고 살아갑니다.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또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도

죽음은 밀쳐내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인생의 마지막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붕대를 벗겨내고 찬찬히 과거와 현재를

자세히 들여다보지만 때는 늦습니다.

 

우리는 언제 다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이 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가장 살아 보고 싶었던 바로 그 내일이다.”

 

하루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명언입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하여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망각한 채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아니면 불평불만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흙에서 나온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은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경고를 잊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요?

 

적선하는 이는 귀신도 어쩌지 못한다.”

옛 어른들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만큼 선행에는 하늘의 힘이

담겨져 있다는 말씀이겠지요.

적선이 좋은 줄은 알지만 실천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을 돕는다는 것이

다 적선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적선이 되려면 남모르게

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늘의 힘이 함께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적선이라고 하면 전부 금전적인 것과

연관 짓습니다.

돈과 재물로 도와야만 적선이 된다고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 아닐까요?

물질이 아니라 애정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정한 말 한마디와 따뜻한 미소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적선이 될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한 작은 기도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적선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적선은 나눔이며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적선하는 이가 많아지면

당연히 은총도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그러한 사람과 자주 만나면

하늘의 힘도 자주 체험하게 될 터이고,

그러한 사람과 사귀면 인생살이 또한

밝아질 것이 틀림 없습니다.

자선을 베푸는 이와 가까이해야 할 이유입니다.

 

 

여섯 살 먹은 어린 소녀가

파자마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슈퍼마켓에 과자를 샀다가

러시아 군의 포격으로 사망하는 뉴스를

접하고 그만 가슴이 먹먹해 졌습니다.

 

인간이라는 탈을 쓰고 태어나

편집광적인 욕심으로 세계를 피로 물들이는

독재자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이차대전의 히틀러가 그랬고

동양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토 히로부미와 본명이 히로히토인 소화 왕이  

한반도에서는 김일성이가 그랬습니다.

 

오늘도 이런 독재자들이 ‘Cras tibi 내일은 너’라는

글자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 읽어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순절이 시작되는 오늘부터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해 함께

간절히 기도 드립시다.

 

그리고 또 하나..

2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제는 엄마가 아직은 어린 두 딸을 두고

떠났습니다.

 

여린 두 자매가 제 눈에도 밟히는데

엄마, 아빠 마음은 어떨까요?

이럴 때, 주님은 진정 사랑이신가..

하며 따져 묻고 싶어 발칙해집니다.

 

주님, 용서하십시오.

이 소녀들의 부모를 편안히 쉬게 하시고

이 소녀들이 세상을 잘 살아 가도록

부디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위 두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나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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