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일이 왜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인가?
1월1일은 한 해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한 해의시작을
예수님의 축일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 축일로 지냅니다.
왜 그럴까요?
원래 12월25일 성탄절은
태양신인 제우스의 탄생일이었습니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우리 믿음의 태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바꾼 것입니다.
이것을 인문학 언어로
문화전이(文化轉移: Transculturation) 라고 합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세 명의 동방박사가 황금, 유향, 몰약을 봉헌한
주님 공현 축일인 1월5일을
성탄일로 지내왔습니다.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생일은 이미
유럽의 그리스 문화 안에서 널리 알려진 날짜이기에
교회는 선교차원에서 그 문화적 기념일을
선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별별 신이 다 있는 다신(多神) 문화인데
다신(多神) 중 최고신(最高神)인 제우스의 생일을
구세주의 탄생으로 바꿈으로
이로써 제우스 시대는 막을 내리고,
유일신인 하느님이며 역사의 주인공인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유럽의 신관(神觀)은 바뀌게 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을
크리스 마스(Chris-Mass)라고 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이름입니다.
크리스 마스(Chris-Mass)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상 어린양의 희생 제사를
실현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이러한 십자가상의 자기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미사를 제정하고,
이를 다시 오시기까지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법으로 이 예식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 전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고,
과월절 음식을 나누면서
빵과 포도주의 잔을 들어 축복하며
이것이 나의 몸과 피임을 선언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의 양식임을 선포하며
이 예식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미사(Mass)’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교회의 공적 예배는
바로 미사입니다.
즉 크리스 마스는
가톨릭교회의 미사를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11월 연중시기를 마치는 마지막 주간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하고,
1월1일을 그리스도의 모친 성모 마리아의 대축일로 정하여
의무축일로 지내도록 합니다.
태양력의 첫날인 1월1일은
그리스도의 축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는 태양력의 첫날인 1월1일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였을까요?
그 이유를 먼저 성체강복의 장면에서 찾고 싶습니다.
타오르는 거룩한 빛이 태양처럼
온 세상을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성광’,
성시간 때 예수님의 거룩한 성체를 담은
성광을 떠올려 봅시다.
성체를 담고 있는 태양과 같은 모양의
황금으로 도금한 성광을
라틴어로 ‘솔라(Sola)’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태양이라는 뜻이고
동시에 시간을 의미합니다.
고대의 시간은 모두 태양의 위치를 보고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모든 생물과 만물의 에너지원이고
동시에 시간을 의미합니다.
사제가 성체를 성광 즉 솔라에 넣을 때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체를 그냥 성광에 넣는 것이 아니라
성체를 금 테두리가 된 유리 케이스에 넣는데.
이것을 ‘루나(Luna)’ 즉 달(月)이라고 부릅니다.
성체를 보호하고 안치하는 방과 같습니다.
이것은 여인의 태를 의미합니다.
아기집을 의미하며 또한 처녀성을 의미합니다.
솔라와 루나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녀인 마리아의 태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되셨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달이 어둠 속에서 빛나듯
마리아의 신앙은 어둠 속에 빛나는 신앙입니다.
단순히 빛나는 태양의 빛이 아닌
처녀인 어머니의 순명과 사랑으로
하느님은 인간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육화(肉化)’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육체로 들어가다라는 뜻으로
In-carnatio라고 합니다.
그 여인의 신앙과 순명을 통해서입니다.
성광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인간이 되게 해주신
어머니인 마리아의 달과 같은
신앙과 역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예수 그리스도 출산은
육적인 어머니로서 만의 공로를 인정받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범이고 모델이며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마리아의 신앙이
신앙의 모범이며 모델이며 원리가
성경 어디에 제시되고 있을까요?
바로 천사 가브리엘의 질문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에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루카 1,38)
라고 답합니다.
그때 마리아의 표정은 어떠하였을까요?
많은 이들이 그녀의 표정이
우울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근거로
그분의 표정은 밝고 친절한 미소가 가득한
얼굴이었다고 확언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종이란 자신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운명을 함께하는 종속관계임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주님은 자비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구원자이신 하느님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종이오니!
라는 말씀을 드리는 성모님의 표정은
밝기만 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종’은 하느님 말씀을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공동운명체
복음에서 안드레아 사도는
단 한마디의 복음으로 그의 형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보았소!”
이 말에 베드로는 지체 없이 달려가
예수를 만나 그 역시 사도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신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며
사랑자체이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기 전에
안드레아의 얼굴,
즉 행복과 확신에 찬 미소 가득한
동생의 변화된 얼굴을 본 것입니다.
결국 복음은 미소였습니다.
미소가 선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안드레아의 미소는
포도주가 떨어져 난감한 상황에 있는
카나 혼인 잔치의 종들에게서도 보입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그러자 하인들은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이제 그것을 가져다 주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물은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무거운 돌 항아리를 가득 채운 하인들은
주인의 잔치가 바로 나의 잔치라는
하나 됨의 증거였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막막했던 하인들은
성모님의 말씀에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하인들의 가득 채움은 신앙이며 희망이며
빛의 존재방식이었습니다.
땀 흘려 그 무거운 돌 항아리를 가득 채우는
하인들의 얼굴에는 짜증과 피로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잔치에서
떨어진 포도주를 다시 얻고자 하는 의지와 희망이
잔치를 돕고 지휘하는 성모님과 하나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종”이 결코 주인과 구분되고
차별 받는 세상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공동운명체적인 관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한 해의 첫날을
천주의 모친의 대축일로 지내며
그분이 첫 기적 카나의 잔치해서 하신 말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를 듣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새로운 한 해의 삶 속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돌 항아리를 옮기는 하인들과 같이!
아멘!!
(이 글은 허윤석 신부님의 강론집에서
참고하여 편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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