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중국법학과 교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시대의 중국은 여러모로 변했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변한 게 식성(食性)이다.
평원뿐 아니라 설산과 사막 등 주로 육지에만 식탐을 부리던 대륙국가가
바다 맛을 알았는지 해양국가로 팽창하고 있다.
그런 결과로 남중국해에선 베트남·필리핀 등과 대립하고 동중국해에선 일본과 갈등을 빚는다.
우리와는 이어도를 둘러싼 해양경계 획정 문제가 있다.
중국의 해양굴기를 어떻게 봐야 하나.
독일의 게오르크 헤겔은
“바다는 정복과 무역을 위해 인류를 부른다”고 말했다.
19세기 말 미 국무장관을 지낸 존 헤이는
“지중해는 과거의 바다, 대서양은 현재의 바다, 태평양은 미래의 바다”라고 구분하기도 했다.
한데 중국은 이 바다의 여왕인 태평양을 바로 곁에 두고서도
그 여왕이 부르는 ‘자유와 무역’의 노래를 악녀의 유혹 정도로 생각했는지
아예 관심을 두지 못하게 했다.
명(明)을 세운 주원장(朱元璋)의 항해 금지령과 해안 봉쇄령이 그것이다.
그는 중국 대륙을 관통하는 대운하 건설에 나섰다.
대신 해안을 통해 실어나르던 공물을 해적으로부터 지키던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을 해체하는 우(愚)를 범했다.
또 무역을 통해 많은 돈을 벌던 지방 토호들을 제압하기 위해 외국과의 교역을 단절시켰다.
이 같은 금해(禁海) 정책의 결과로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 패배 이래 ‘백 년의 치욕(百年恥辱)’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후 한없이 내리막길을 걷던 대륙국가 중국에 다시 회춘의 바다 맛을 알게 해 준 이는 누굴까.
덩샤오핑은 평생 바다를 사랑했다.
덩에게 바다는 진출할 시장이자 확보해야 할 영토였다.
자본의 선박이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바다에서
덩은 일국양제(一國兩制, 한 나라 두 제도)나 외상투자기업제도 등
창의적이면서도 실사구시적인 정책들을 건져올렸다.
덩은 특히 사회주의 중국 동남부 연해지역에 5개의 자본주의 섬이라고 할
선전과 주하이(珠海) 등과 같은 경제특구를 건설했다.
그래서일까. 세계적인 중국학 석학인 존 페어뱅크 미 하버드대 교수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중국의 유구한 대륙성 전통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바다를 향한 덩의 행보는 집요했다.
74년 1월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이던 덩샤오핑은 이렇다 할 선전포고도 없이
북베트남(월맹)의 시사(西沙, 파라셀)군도를 순식간에 점령해 하이난(海南)도에 편입시켰다.
또 87년 3월 중앙군사위 주석이던 덩은 난사(南沙, 스프래틀리)군도마저 삼켰다.
“지역 패권은 육지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세계 패권을 쥐려면 해양 장악이 필수다.”
이 같은 카를 마르크스의 말에 충실하기라도 하듯
2006년 12월 개최된 중국 해군 제10차 당 대표대회에서 당시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는
‘해양대국, 해군강국’ 건설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7년 9월 중국에선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빚는
센카쿠(尖閣, 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는 물론 오키나와 본도를 포함한 류큐(琉球)군도 160여 개 섬을
모두 돌려달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본이 경악한 것은 불문가지다.
2010년 9월엔 센카쿠 인근 해상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중국 어선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21세기 동중국해 패권을 둘러싼 중·일 간 힘겨루기의 전초전 성격을 띤다.
한데 주목해야 할 건 당시 일본 관계와 언론, 학계가 그 비난의 포화를
후진타오 주석은 제쳐두고 당시 군사위 부주석이던 시진핑에게 집중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중국의 강경 노선을 주도한 인물이 후가 아닌 시진핑이었기 때문이다.
또 시가 1인자에 오르면 더 강경한 해양팽창 정책과 항일(抗日)운동이 전개될 것으로 우려했던 것이다.
일본의 걱정이 기우만은 아니었다.
군부를 장악한 시진핑은 특히 해군의 핵심 요직에 측근을 포진시켰다.
좋은 예가 현 중앙군사위 상무위원 8인 중 실세인 해군총사령관 우성리(吳勝利)다.
올해 71세로 은퇴할 나이건만 굳건하게 현직을 사수하고 있다.
우는 시진핑이 푸젠(福建)성에 근무할 때는 푸젠 해군기지 사령관,
시가 저장(浙江)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저장성 닝보(寧波)에 위치한 동해함대 부사령관을 맡았다.
시진핑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가 현역 해군 소장이라는 사실 또한 예사로 넘길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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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수렁에 빠졌던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69년 ‘아시아는 아시아인 손으로’라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여기서 ‘아시아인 손’은 ‘일본인 손’과 동의어다.
미국은 마침내 72년 5월 일본에 오키나와를 넘기는 대가로 아시아에 대한 짐의 일부를 일본에 맡겼다.
시진핑 시대의 메가 프로젝트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육로·해상 실크로드)’ 건설이다.
일대일로는 “미국은 북미와 중남미 신대륙을 맡아라.
중국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을 아우르는 구대륙의 맹주가 되겠노라’란 선언문과도 같다.
그런 야심의 중국이 미국에 밀리는 주요 부분은 해군력이다.
그래서 2000년대부터 국방산업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국의 투자 우선순위는 해군>공군>육군 순이다.
현재 항공모함 2척을 보유한 중국은 2025년까지 3만~4만t급 중형 항모 2척과
6만t급 핵추진 대형 항모 6척을 추가로 건조할 계획이다.
미국이 비록 ‘아시아 회귀’를 외치고 있지만 대규모 재정적자에 따른 국방비 삭감으로
‘힘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力不從心)’ 상태다.
자연히 세계 경제질서 개편에 따른 해양질서 재편은 불가피해 보인다.
즉 미국이 과거 아시아를 일본 손에 남기고 몸을 빼려 했듯이
가까운 미래엔 미국이 ‘제2의 닉슨 독트린’ 즉 ‘아시아를 중국 손’에 맡겨 놓고
미 대륙으로 퇴각하는 날을 중국은 학수고대하는 것이다.
시진핑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향해
“태평양은 매우 넓어 중국과 미국의 이익을 모두 담을 수 있다”고 한 말은
제2의 닉슨 독트린을 재촉하는 중국의 주문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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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해양굴기는 우리에게도 도.전이다.
최근 우리 국민 감정을 자극하는 건 서해를 제집 드나들 듯하며
싹쓸이 조업으로 어족 자원의 씨를 말리는 중국의 불법조업 어선들이다.
지난달 초엔 중국 어선이 우리 해경단정을 전복시키기도 했다.
단호한 응징이 필요하다.
중국 법원은 관용 선박을 파괴한 자에겐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사형을 선고하는 등 엄벌에 처한다.
단속에 저항하는 중국 어선엔 공용화기 사용 등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
중국은 저자세의 이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강한 자존감을 보였던 고려는 오늘날에도 중국인에게 경외의 대상이지만
사대외교로 일관한 조선은 가볍게 본다.
한편 우리가 서둘러야 할 게 있다. 대륙붕법 제정이다.
한·중·일 3국 중 우리만 대륙붕에 관한 별도의 법을 두고 있지 않다.
중국과 일본이 군침을 흘리는 건 배타적경제수역(EEZ)의 수산 자원보다는 대륙붕의 광물자원이다.
중·일이 EEZ와 대륙붕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반면 우리는 EEZ법만 제정해
대륙붕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국내법적 근거가 취약한 실정이다.
70년 당시 우리나라가 대륙붕을 개발할 법적 근거를 제공한 해저광물자원개발법에는
해저광물을 석유 및 천연가스 두 종류로 제한하고 있다. 그
러나 대륙붕엔 유황·칼륨 등 비금속 자원과 구리·아연·니켈·망간 등 다양한 광물자원이 쌓여 있다.
82년 제3차 유엔해양법협약에도 생물 및 무생물자원 개발로 그 범위가 대폭 확대됐다.
따라서 우리도 유엔해양법협약 수준으로 대륙붕 자원에 관한 국내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중국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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