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이회영 선생 등 독립열사 생전 자취 고스란히 보존
한국인·중국인 추모의 발길 끊이지 않아…"안중근의 용기가 놀랍다"
(다롄=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 땅을 유린했을 때 중국인들은 대항할 엄두를 못 냈지만 안중근 의사가 앞장서서 이토를 처단했다. 그 놀라운 용기에 경의를 표하러 이곳에 종종 온다."
가마솥 더위를 식히듯 비가 촉촉하게 내리던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의 뤼순(旅順)감옥. 그 곳에서 만난 중국인 관람객 류(劉)씨(61·다롄<大連> 거주)가 기자에게 건넨 말이다.
중국 당국의 수리를 거쳐 지금은 '뤼순 일아(日俄)감옥 구지(舊地) 박물관'(이하 뤼순감옥박물관)으로 거듭난 뤼순 감옥에 한국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 관람객도 많다.
제71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찾아간 이 곳은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를 포함해 일제에 항거하다가 스러져간 수많은 독립 열사들의 숨결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뤼순감옥은 1907∼1945년 존재했고, 그 가운데 상당기간을 일제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항일운동가를 수감해 고문하고 사형집행도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1909년 10월26일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안 의사가 일제 침략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하고 붙잡혀 5개월간 뤼순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인 1910년 3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곳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안 의사 이외에도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과 우당 이회영(李會榮·1867~1932) 선생이 뤼순 감옥에서 옥사했다.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했던 유상근·최흥식 선생 등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13일 오전 9시 박물관 개관과 동시에 한국인과 중국인 관람객 수백 명이 줄지어 입장해 내부는 북적였다.
우선 감옥박물관 정문 왼쪽에 마련된 관람객용 입구로 들어서자 붉은 벽돌로 건립된 낡은 일본식 본관감옥 건물이 나타났고, 2층 구조인 그 내부는 쇠창살 문이 여전한 감방들과 좁은 통로가 미로처럼 연결돼 있었다.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박물관에는 안 의사 기념관이 별도로 만들어졌는데 본관 건물의 오른쪽으로 200m 지점에 있었다.
안 의사가 사형 집행됐던 곳을 리모델링해 그 입구에 '안중근 의사가 의로운 죽음을 한 곳'(安重根義士就義地)이란 간판이 걸렸다.


일제가 감옥을 증축하면서 별도의 사형장을 만들면서 안 의사가 사형집행됐던 교형실은 후일 세탁소로 사용됐다.
근래 상수도시설을 위한 뤼순감옥 배치도가 발견되면서 사형장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100㎡ 가량 되는 안 의사 기념관 안에 푸른 기상을 상징하는 대형 소나무 사진을 배경으로 안 의사의 흉상을 모셨다.
흉상 좌우 벽면엔 안 의사가 뤼순감옥 수감 때 남긴 50여 점의 유묵(遺墨) 필사본으로 가득 채워졌다.


기념관 우측에 마련된 600㎡ 규모의 전시관에는 안 의사의 항일운동 사료와 심문 기사들을 정리한 전시물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안 의사 이외에 신채호·이회영 선생, 그리고 유상근·최흥식 선생 등의 흉상과 더불어 사료를 소개하는 소규모 전시실 4곳도 마련됐다.

광복절을 맞아 대한광복회 독립운동사적지 순례단이 뤼순감옥박물관을 찾아 선열들의 흔적을 더듬고 있었다.
신동업(57·광주광역시) 순례단원은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른 이곳에 오니 일제 만행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며 "안중근 의사 등 조국광복에 목숨을 바친 선조들이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순례단과 일정을 함께한 이용섭 전 의원은 "잠자던 민족혼을 일깨워주고 나태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라며 앞으로 정부나 관계기관이 애족심을 일깨워주는 교육에 힘써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 의사가 수감됐던 독방은 본관 건물 서쪽 간수부장 당직실 바로 옆에 있었다.
한국어 이외에 중국어·영어·일본어 등 4개 국어로, 이 곳이 안 의사가 수감됐던 곳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부착돼 있다.
쇠창살이 있는 유리창문 너머로 보이는 6㎡ 남짓한 방 안에 안 의사가 쓰던 서예 도구와 책상, 의자, 침구 등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다.
안 의사는 이 방에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완성하고 '동양평화론' 집필 작업도 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사형집행을 연기해 달라는 청원을 무시한 일제가 집행을 앞당기면서 동양평화론은 완성하지 못했다.
안 의사가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라는 유묵을 쓴 곳도 바로 이 방이다.
안 의사의 사형이 집행됐던 20㎡ 규모 처형장도 감옥 내에 복원돼 있다.
과거 뤼순 감옥에 3개의 교수형장이 있었는데 '7개의 계단에 올라 의자에 앉아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당시 언론 보도 내용을 근거로 재현했다.
처형장 주변 벽면에는 중국 '국부'(國父)로 불리는 쑨원(孫文)과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이 안 의사의 기개를 높이 평가한 추모글 필사본들로 채워져 있다.
박물관 안내원 방(龐)모 씨는 "한국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안 의사의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존경한다"면서 "하루 수백 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아와 중국,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한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뤼순감옥을 항일운동의 주요 국가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면서 군사기밀 보호 등을 이유로 외국인의 방문을 불허해오다가 2009년부터 전면 개방했다.
뤼순감옥 박물관 본관 건물 2층에는 신채호 선생이 갇혔던 '35호 감방'과 이회영 선생이 옥사했던 '36호 감방'이 나란히 있다. 문 오른쪽 벽엔 신채호·이회영 선생의 약력과 뤼순감옥에 투옥돼 옥사하기까지 경위를 설명한 패널이 걸렸다.
신채호 선생은 1930년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서 복역한 지 6년 만에 순국했다.
그는 뤼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숨졌으며, 무덤일망정 일제의 발굽에 짓밟히고 싶지 않다는 뜻에서 죽은 뒤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재를 털어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근거지를 확보하려 다롄으로 가던 중 체포됐던 이회영 선생은 뤼순감옥에서 수감 중에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했다.
뤼순감옥 박물관에서 만난 김민정 씨(42)는 "이곳에 오니 머나먼 타향에서 일제 탄압에 항거했던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정신과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realism@yna.co.kr
'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 > 중국과 친해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이 스물에 사장이 못 되면 대장부가 아니라는 중국 (0) | 2016.08.17 |
---|---|
중국 熱風에… 대구, 서울보다 먼저 열대야 탈출 (0) | 2016.08.16 |
달라진 중국… 주민 시위에 핵연료 재처리시설 추진 중단 (0) | 2016.08.16 |
여자가 아름답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 (0) | 2016.08.12 |
[스크랩] 北, 중국에 동해NLL 조업권도 팔았다…통치자금 충당 목적 (0) | 2016.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