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마음을 열고

수필 보리를 외우며 김화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주님의 착한 종 2016. 4. 1. 14:11




보리.


1.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논과 밭에는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다.

차가움이 엉긴 흙덩이들을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 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굳고 차가운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고,

이제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날개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간 지도 오랜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릿 속에 간직하며,

차가운 허리도 잊고 집으로 돌아오고 했다.

 

2

온갖 벌레들도, 부지런한 꿀벌들과 매미들도 다 제 집 속으로 들어가고,

몇 마리 산새들만이 나지막하게 울고 있던 무덤가에는,

온 여름 동안 키만 자랐던 속새풀 더미가

갈대 꽃 같은 솜 꽃만을 싸늘한 하늘에 날리고 있다.

물도 흐르지 않고 다 말라 버린 갯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 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들도 푸른 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어 찌푸리고 있는데,

,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 솔잎 끝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이제 모든 화초는 지심(地心)속의 따스함을 찾아서 다 잠자고 있을 때,

, 보리만은 억센 팔 들을 내뻗치고 새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자라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꿈쩍도 아니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억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지금 어둡고 차디찬 눈 밑에서도,

,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 오는 그윽한 유월의 훈풍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밑을 훤히 비추어 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아무 말이 없이 참고 견디어 왔으며,

삼월의 맑은 하늘 아래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다.

 

3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덧 남향 언덕 위에 누른 잔디가 솔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 보리는 논과 밭이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덮는다.

보리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에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 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들이 새날과 함께 빛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 대고,

너의 깊고 아늑한 품 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놓는다.

 

4

어느 덧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

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 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 보리는 공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 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그윽한 향기를 온 몸에 지니면서,

,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사명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머리를 숙이고 성자(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5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아름 덥썩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 스르릉 너를 거둔다.

농부들은 너를 먹고 살고, 너는 또한 농부들과 함께 자란다.

,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한다면서 살아간다.

 

6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 김화진이라는 친구가 꽁보리밥에 관한 유년의 추억을 글로 보내주었다.

50년은 넘었을, 중학교 1학년 때 인가? 2학년 때였던가?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한흑구 님의 수필 보리가 생각났다.

 

흔히 수필이라고 하면 몽테뉴, 베이컨, 에머슨, 찰스 램 등

외국 작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국내 수필가들 중에도 수필로 일가를 이룬 분들이 적지 않다.

김규련, 김소운, 김태길, 노천명, 법정, 안병욱, 양주동,

윤오영, 이상, 이양하, 이희승, 조지훈, 피천득 등등.

 

지성미 넘치는 수필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수필가들도 있고,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높은 문학성과 독특한 개성, 문체를

인정받는 수필가들도 제법 많다.


교과서에 나온 한흑구님의 수필 보리를 처음 읽었을 때,

아직 어렸던 나는 무언지 모를 끌림에 이 수필을 외우고 말았다.

나중에 워즈워스나 롱펠로의 시를 읽었을 때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는 보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흑구 의 수필은 시적이고 서정적이다.

한 문단씩 떼어내서 읽으면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된다.

그래서 가끔 그의 수필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시를 읽는 마음으로 그의 수필을 읽어 내려가면

번잡한 일상을 초월한 자연미를 느낄 수 있다.

시를 쓰듯 수필을 써 내려간 그의 장인 정신에서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한흑구님은 6.25 때 포항으로 피난을 가셔서 그 후 바다가 좋고 물이 좋아

그곳에서 교편을 잡으며 안빈낙도의 삶을 사셨다고 했다.

올해가 탄생 100주기라고 했던가?

 

문득 보리를 외우며 지난 날을 회상하게 하여준

친구 김 화진 형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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