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오 하느님

묵상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주일 복음 묵상

주님의 착한 종 2015. 12. 14. 09:32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주일 복음 묵상


2015-12-13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독서:스바 3,14-18ㄱ 독서2:필리 4,4-7
복음: 루카 3,10-18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10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시작기도
성령님, 삶을 외면하지 말고 더욱더 사랑하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메시아를 기다리며 기대에 찬 백성이 던지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는 ‘또 다른 무엇’을 할 기세가 상당하다.(루카 10,25; 사도 2,37) 그 기대는 대개 자신의 본모습을 한 번 더 덮어버린다. 지금의 나를 보지 않은 채, 정답으로 치부되는 ‘합당한 자세와 행위’를 묻는 것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대치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찾아 나서면 메시아의 가치는 우리 기대치 딱 그만큼 왜곡되거나 축소된다. ‘내가 내려놓을 것이 무엇’인지 찾아 나설 때, 메시아는 자유로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 또한 자유롭게 할 것이다.

자신을 낮추는 것, 신발 끈도 풀 수 없을 만큼 낮추고 또 낮추는 것 외엔 메시아를 만날 방법이 없다. 온화하고 정갈한 도인 같은 모습을 보러 메시아가 오시는 게 아니고 짓눌려 짜증 나고, 뜻대로 되지 않아 독해지고, 어떻게든 내가 살아야겠다며 뭐든 쥐어보고, 쥔 만큼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따져보는 우리의 지친 일상에 메시아는 오신다. 그 일상을 조용히 돌아보고 비워내는 것으로 메시아는 자유로이 우리 곁에 와 계신다.

묵상
예전 고향 친구들과 만든 ‘계모임’ 이름이 ‘이대로’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대로 쭉 우정을 나누자는 의미로 지은 걸로 기억한다. 그 후로 만날 때마다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이 늘 정겹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건, 지금의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나를 제대로 본다는 건, 대개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낮 동안 일하면서 도드라지는 나의 한계와 부족함은 부끄러운 저녁을 불러온다.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예수를 섬긴다면서 미래의 화려한 나를 섬기기 위해 거짓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하며, 과거의 잘잘못에 허덕이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현실이 그러니까…’라며 애써 합리화하지도 말아야 한다. 지금 이대로, 더 나을 것도 더 못할 것도 없는 듯, 그렇게 예수께 나아가면 된다. 예수는 의인이든 죄인이든 사랑하고 있으니까….

묵상 글을 쓸 때마다 포기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우리 사회의 맥락 안에 말씀을 곱씹어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2천 년 전의 글이 지금 나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언지 현실 문제와 더불어 말씀을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고민은 늘 지금 ‘이대로’의 삶을 외면하지 말자는 데서 끝난다. 내칠 수도 없고 막연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지금의 삶, 여기에 예수는 당신의 머리를 두고자 하셨다는 희망이 슬프게 아름답기 때문이다.

마침기도
주님, 당신과 이 나라, 이 사회를 늘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박병규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