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 中 ‘경주최부자’vs‘짝퉁기부왕’
-중국 자선부호, 진짜와 가짜사이
-‘호랑이 연고’ 만든 화교 후원후家, 지금까지 1조원 이상 기부…“대중에게서 번 돈 환원해야”
-쓰촨 ‘지진영웅’ 천광뱌오, 기부 퍼포먼스 조작 드러나 구설수…허위기부 논란도
-중국 본토의 경우 기부문화, 자선단체 투명성 등 관련 환경 수준미달
[헤럴드경제=슈퍼리치섹션 윤현종 기자]
기부나 자선을 행하는 중국인 부호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누가 봐도 진정성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행하고 있습니다. 후손에게도 막대한 재산보단 자신의 철학이나 정신을 물려줍니다. 또 다른 이들은 거액을 내놓지만 진정성에 의문이 갑니다. 세상을 위한 것인지 본인의 ‘유명세 마케팅’인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거짓말ㆍ과장을 일삼기도 합니다. 주로 중국 본토에 이런 부호들이 눈에 띕니다. 지금도 가문의 기부정신을 실천 중인 중국판 ‘경주최부자’ 대표와 대륙 ‘짝퉁기부왕’으로 낙인찍힌 부호를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화교출신 ‘만금유(호랑이연고)대왕’…“부자 되려고 사업한 것 아냐”=혹시 ‘호랑이연고(타이거밤ㆍTiger Balm)’를 아십니까. 특히 국내 50대 이상 중ㆍ장년층은 웬만한 상처쯤 거뜬히 낫게 하는 가정상비약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텐데요. 호랑이연고도 그 중 하나입니다.
호랑이연고(타이거밤ㆍTiger Balm)
사실 이 약은 19세기 청나라 때 미얀마로 간 화교 후즈친(胡子欽)의 작품입니다. 약초학자로 알려진 그는 현지 약국 영안당(永安堂)을 세우고 중국 전통약초와 동남아 민간처방을 섞어 이 약을 생산했죠. 최초 이름은 ‘만금유(萬金油)’였습니다. 이 연고를 세상에 알린 건 아들 후원후(胡文虎ㆍ1882∼1954)입니다. 그가 ‘만금유대왕’이란 별명으로 불린 이유입니다.
20세기 초 호랑이연고를 크게 히트시켜 최대 화교부호로 올라선 후원후. (출처=바이두백과)
후원후는 1908년 가업을 물려받아 1910년 이 약을 본격 마케팅합니다. ‘호랑이연고’로 이름을 바꾼 만금유는 인구가 밀집한 중국ㆍ동남아를 집중 공략합니다. 후원후는 1932년 사업거점을 홍콩으로 옮기며 판매망을 넓히는데요. 비슷한 시기 이 연고는 태국 등 동남아 대부분 지역을 석권합니다. 중국에도 상하이 등 14개도시에 분점을 냈습니다.
그 때 상하이 인구가 400만에 육박했는데요. 약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당시 한 경제학자가 “만금유 잠재수요는 세계인구 절반 이상일 것”이라고 평할 정도였습니다. 실제 1930∼1940년대 후원후의 약국체인이 1년간 만든 약품의 가치는 총 1억2000만싱가포르달러였습니다. 황금1000만냥에 해당했다고 합니다.
싱가포르에 위치한 후원후의 옛 사업거점(호파빌라ㆍhawpar villa). 현재는 테마파크로 개조됐다.
그는 1913년부터 동남아 등지에 신문사 15개를 잇따라 세우며 미디어사업에도 진출했습니다. 1938년 창간한 홍콩의 ‘싱다오르바오(星島日報)’는 지금도 현지 주요언론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후원후는 화교 최대부호로 올라섭니다. 1938년 기준 그의 개인재산은 미화 3000여만 달러였습니다. 당시 중국인 1인 평균소득의 38만배 수준이었죠. 지금 가치로 따지면 한화 5750억원 규모입니다.
과거 호랑이연고 광고차량 및 광고문구.
이렇게 사업과 재산이 정점에 달하던 시기, 후원후의 자선ㆍ기부사업도 본격화 합니다. 여기엔 확고한 목적이 있었는데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동포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 스스로도 “사업 목적은 영리가 아니다. 나라를 구하려면 사람이 근본이다. 대중에게 번 돈은 환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합니다. 후원후의 사업 자체가 보건(약품)과 계몽(언론)에 방점이 찍혀있었습니다.
후원후(맨 왼쪽)는 자선ㆍ기부와 항일운동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 오른쪽은 대일항전시기에 그가 기부한 병원용차량.
그는 1928년 싱가포르에 초ㆍ중등학교 10여개를 세우며 자선 활동에 발을 딛습니다. 7년 뒤엔 150만위안을 들여 중국 내 300여개의 초등학교를 설립합니다. 또 샤먼(厦門)ㆍ푸젠(福建)대학 등 70개교에 재산을 기부했습니다. 또 비슷한 시기 약1000만위안을 써 병원 100곳 이상을 신설하거나 수리했습니다.
후원후는 항일운동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200만위안으로 당시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의 ‘항일구국 국채’를 매입해 중국의 대일전쟁을 지원합니다. 그는 이를 포함, 전쟁자금으로 1000여만 위안을 내놓는데요. 이 기부액은 당시 중국 최대규모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1930∼1940년대 후원후가 자선ㆍ기부에 쏟은 돈은 확인된 것만 2150만위안정도입니다. 현재 가치로 1조3700억원정도인데요. 비슷한 시기 대륙 국민당 정부 1년 예산의 5%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사업 넘어갔지만 여전히 남은 ‘기부정신’=1954년 후원후가 죽은 뒤 그의 제약회사는 조카 후칭차이(胡才)가 맡습니다. 기업명도 ‘후바오(胡豹ㆍhawpar)인터내셔널(이하 후바오)’로 바뀌어 1969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증시에 상장합니다.
그러나 이후 약 10여년 간 회사는 파산→싱가포르 정부의 법정관리→경영권 분쟁을 겪습니다. 결국 1981년 후바오는 싱가포르 대형은행 UOB의 위 초 야우(당시 51세) 회장 손에 들어갑니다.
현재 싱가포르에 있는 후바오 본사건물(호파센터).
반면 후원후의 또 다른 가업을 물려받은 다른 후손은 여전히 자선활동에 활발히 매진중인데요. 바로 수양딸 후시엔(胡仙ㆍ여ㆍ84)입니다.
그는 아버지 사망직후 언론사업을 물려받습니다. 30년 뒤 후시엔의 ‘싱다오그룹’은 전성기인 1984년께 시가총액 84억 홍콩달러를 찍습니다. 후시엔의 몫은 50억 홍콩달러 (한화 5000억원, 현재 기준 7150억원)에 달했습니다.
후원후의 딸 후시엔(왼쪽)과 그가 이끌었던 언론사 중 하나인 싱다오르바오.
하지만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그의 사업도 내리막을 걷습니다. 그는 빚만 6억위안을 졌고, 급기야 아버지가 남겨준 후바오별장까지 팔게 됐죠. 급기야 1999년 그는 싱다오그룹을 다른 기업에 넘기고 회장직에서 물러나 이사회 고문으로 남습니다. 매년 900만위안을 받으며 파산은 겨우 면합니다.
중국 푸젠(福建)성에 있는 후원후의 옛 별장. 지금은 현지 지자체로 기부돼 후원후 기념관으로 사용중이다.
그러나 후시엔은 부친의 유지만큼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자선사업이죠. 1998년 이후 그는 자선재단 ‘후원후 기금회’ 회장 자격으로 광저우(廣州) 등지에 있는 가문의 부동산 자산을 현지 지자체에 내놓고 아동 도서관 등에 쓰도록 지원했습니다. 지금도 그는 현지에서 가문의 자선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가문의 고향인 중국 푸젠성을 방문한 후시엔의 모습.
▶논란 끊이지 않는 ‘짝퉁기부왕’의 기행=반면 기부와 관련해 논란의 중심에 선 부호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제기되는 거짓말ㆍ과장행동 때문인데요. 대표적인 인물이 천광뱌오(陳光標ㆍ47)장쑤황푸재생자원이용유한공사 회장입니다. 장쑤(江蘇)성 출신인 그는 2003년부터 자원재생사업을 벌여 큰 돈을 벌었습니다. 천 회장 자산은 지난해 후룬연구소 집계 기준 45억위안(약 7920억원)입니다.
현재 그는 기부 퍼포먼스를 조작한 사실이 들통나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작년 8월 천 회장도 당시 기부의 일환으로 유행했던 ‘아이스버킷챌린지’에 동참했었는데요. 그때 사용했던 물이 얼음물이 아닌 온수였단 게 드러난 것입니다. 천 회장 자신도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지난 3월 한 현지매체 인터뷰에서 “(퍼포먼스 직전) 통 속에 50도 가량의 물을 먼저 넣었다”며 “수온이 높아 다리가 빨개질 정도였다”고 털어놓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과장된 행위예술이었다”고 변명했습니다.
천 회장이 지난해 8월 아이스버킷챌린지에 도전하는 모습. 그는 사진의 물통 속에 50도 정도의 온수가 먼저 들어있었단 사실을 인정했다. 도전 당시 천 회장은 물통 속에 얼음물이 가득했고 자신이 여기서 30분을 버텼다고 주장했다.
여론은 들끓었습니다. 중국 국영중앙방송(CCTV)조차도 논평을 내고 “천광뱌오는 대체 무슨 도전을 한 것이냐”며 “이건 대중을 기만에 빠뜨린 사기”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일각에선 법적 처벌도 주장합니다. 중국 사회과학원 한 관계자는 “공익자선행위의 신뢰성을 담보할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평했습니다.
사실 천 회장은 2008년 5월 8만여명이 사망한 쓰촨(四川)대지진 때 중장비를 끌고 현장에 최초로 도착,140여명을 구해내 유명세를 탔습니다. 당시 정부도 그를 ‘지진영웅’이라며 높이 평가했죠. 그런데 천 회장의 자선ㆍ기부에 대한 논란도 그 무렵부터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2010년 9월 “사망 후 전재산을 자선사업에 쓰겠다”고 말한 천 회장은 이듬해 1월엔 “대만이 원한다면 재산 전부를 중국-대만 간 교통인프라 건설에 쓰겠다”고도 밝힙니다. ‘전재산을 걸겠다’는 발언의 진정성이 다소 의심가는 대목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비슷한 시기 그는 허위기부 의혹도 받았습니다. 2011년 4월 중국경영보 등에 따르면 천 회장은 “2010년 100만위안(1억7600만원)을 중국인권기금회에 기부했다”고 밝혔지만 애초부터 이런 단체가 없었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그는 또 “중국 적십자에도 100만위안을 내놨다”고 말했지만 적십자 측은 이를 부인했습니다.
자선 방법도 논란거리라는 지적입니다.
2011년 윈난성 지진 현장에 가서 현금을 나눠주고 있는 천광뱌오.
천 회장은 4년 전 윈난(雲南)성 지진 때 피해 현장을 방문해 10만위안 현금다발 330개 뭉치를 벽돌처럼 쌓아놓고 지역 주민에게 돌려 논란이 됐습니다. 이같은 방법은 대륙 밖에서도 이어졌는데요. 2011년 1월 설을 앞두고 그는 대만 전역을 돌며 5억대만달러(약 175억원)를 현지인에게 뿌렸습니다.
한 미국 기자가 받은 천광뱌오의 명함. 중국의 도덕적 지도자ㆍ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롤모델 등의 소개가 표기돼 있다.
지난해 8월 한 인터뷰에 나와 자신의 아들에게 “단 20센트를 기부해도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라”고 당당히 말한 천 회장의 명함엔 자신을 소개하는 명칭 9개가 씌여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아래와 같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카리스마 있는 자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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