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촛불, 영원한 횃불
지난 92년 한중 양국의 국교 수립 이후 대기업들의 본격적인 중국 진출이 가시화 되었을 때
현지 관련 본사 보고 업무 중의 주요 이슈는 덩샤오핑 선생의 동정이었다.
주로 외국 기사를 인용한 건강과 안위에 대한 단편 소식, 그리고 유고 시에 중국의 개방정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등에 관한 것이었다.
대부분은 우려 섞인 시각과 전망이 주를 이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수교 초기에 개방정책을 믿고 중국 진출을 주장해 투자했던 우리 기업의 실무자들은 본사의
거친 질문에 대응 방안을 써내려 밤새 고생했던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1997년 2월, 덩샤오핑 선생은 꿈에서도 그리던 홍콩 반환을 불과 5개월 앞둔, 92세의 비교적 장수한
연세로 그의 나라, 중국을 떠났다.
하지만, 서방세계의 갖은 걱정과 우려에도 중국은 더욱 지속적으로 발전했고, 2010년 외형적인 경제
규모로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 올라섰다.
필자는 지난 96년 우연히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에 비치된 '덩샤오핑 문선(2권)'을 보게 되었는데,
당시 조금은 불투명 했던 중국 경제의 전망과 덩샤오핑
선생이 꿈꾸는 미래의 중국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의 느낌은 경제적인 전망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
었지만,
책 속에 오롯이 배어있는 덩샤오핑 선생의 국가관,
철학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덩샤오핑 문선 : 개혁개방 정책이 정착화 되기 시작한
82년부터 90년 사이 덩 선생의 각종 담화를 단편적으로
정리한 서적)
최근에 우연히 상기의 책을 다시 보게 됐다.
이제는 돌아가신 덩샤오핑 선생의 시험지를 채점하는
기분으로 선생께서 언급하신 주요 경제 지표에 대해
꼼꼼히 살펴보게 됐다.
현실과 비교하며 책을 읽으며 나름의 평가를 마치니
위대한 지도자가 세상을 어떻게 변모시켰는지에 대해
진심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덩 선생의 어떤 점이 구체적으로 중국을
변모시켰는지 따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위대한 영웅의 행적에 대해 일개 범인의 조그마한 잣대로 이러쿵저러쿵 한다는 것이 언어
도단임을 안다.
그래도 마음속의 영웅에 대해 자신만의 잣대로 왈가왈부 해보는 것도 의의는 있지 않겠는가 반문해
본다.
'实事求是' 몸소 실천한 덩샤오핑
필자는 역사학자도 인물평론가도 아닌 중국 현지의 외국인사업가로서 중국에서 17년간 느끼고
경험한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 덩 선생의 위대함을 거론해보려 한다.
첫째는 인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겠다는 확실한 목표 설정이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나라가 이렇게 큰데도 이처럼 가난하니 생산을 발전시키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문혁의 사인방은 ‘가난한 사회주의’, ‘가난한 공산주의’를 주창하였는데 이는 황당무계한 말들이다.”
(1982년 9월 담화 중 일부) 이 담화는 덩샤오핑 선생이 개혁개방의 필요성 및 당위성에 대해 가장
역설적으로 주장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덩샤오핑 선생은 1949년 중국 공산당 혁명 성공 이후, 십 수년 동안 정치투쟁의 과정 속에서 3번의
실각과 복권, 그리고 잡은 마지막 기회 앞에서 인민들에게 시종일관 주장하는 "묵은 생각을 버리고
신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실사구시’의 정신을 강조했다.
84년에 언급한 덩 선생의 담화 내용 중 금세기 말(1999년) 까지 경제목표에 대해 언급한 사항이 있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당시의 국가 GDP는 400억 달러, 중국인민들의 1인당 GDP는 300달러에 불과한데,
금세기 말까지 1인당 국민 소득 800달러, 국가 GDP가 1조 달러에 다다르게 되면 인민들이 먹고 사는
것에는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실제 1999년 말 월드뱅크 자료에 따르면 국가 GDP는 1조 830억 달러이고, 1인당 GDP는 870
달러 정도로 그가 세운 목표를 달성했다.
아울러 이후 불과 10년이 지난 2010년에는 국가 GDP가 5조8800억 달, 1인당GDP는 4,412달러에
달했으며, 특히 국가 GDP는 일본의 5조 4700억 달을 추월해 외형적으로는 미국 다음의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승천'했다.
둘째는 철저한 자기겸손으로 인민에게 다가간다.
“저는 개인적인 형식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도 한 개인이 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전기를 쓰는 것을 찬성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좋은 일도 하였지만 그릇된 일도 하였습니다. ‘
문화대혁명’ 전에 우리에게 실수가 있었는데, 예를 들면 ‘대약진 운동’ 같은 것입니다.
물론 나는 주요 제창자는 아니었지만 반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오류에 나도 책임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전기를 쓴다면 자기의 공적도 써야겠지만 자신의 오류나 실수도 써야 합니다.”
이 담화는 1986년 9월에 미국의 기자가 덩샤오핑을 취재하면서
“지금까지 중국의 어떤 공공 장소에서도 당신의 사진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내용이다.
셋째는 국가의 설계사로서 본인보다는 국가 미래에 대한 준비를 우선한다.
중국 현대사의 전환점인 개혁개방의 설계사인 덩 선생의 일거수 일투족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즉 설계사인 덩 선생께서 너무 연로한 나이(70세 중반)에 개방을 시작해서 사소한 감기에도 세계가
주시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개혁개방 역시, 부작용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 발생된 천안문 사태는 국가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즉 대외적인 불신을 잠재우기 위한 성공적인 정권교체가 필요했다. 이점에 착안하여 덩 선생은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살아있는 동안에 안정적인 세대교체를 한 셈이다.
“만약 한 당이나 나라가 희망을 한두 사람의 위엄과 명망에 둔다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게 저의
견해입니다.
그럴 경우 그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전체가 불안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제11기 3중 전회 이후, 모두들 내가 총서기, 국가 주석을 맡기를 희망했지만 내가 모두 거절했습니다.
당의 제 13차 대표대회에서 나와 일부 원로 동지들은 지도 핵심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는 중국의 미래는 새로운 지도 집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988년 9월 5일 담화 일부)
넷째는 역사발전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대범함이다.
“역사를 총결하는 데는 개인의 공적과 오류에만 착안하지 말고 미래를 개척하는데 착안해야 합니다.
지난날의 성공은 우리의 재산입니다.
우리는 ‘문화대혁명’을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도 ‘공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만한 교훈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1988년 9월 5일 담화 중 일부)
또한 문선 내용 중 전반적으로 마오쩌둥 주석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언급과 일관성 있는 존경심을
나타냈지만, 모주석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언급한 것이 전부다. 참으로 절제된
정확한 표현이다.
“마오쩌둥 주석은 위대한 영도자 입니다. 중국혁명은 그분 지도아래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중대한 결점이 있습니다.
바로 생산력의 발전을 소홀이 한 것입니다.
그분이 생산력을 발전시키지 않으려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방법이 틀렸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약진 운동’ 인민공사는 사회경제의 발전 법칙에 근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공한 지도자의 일생은?
덩 선생은 “본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뻣던 일은 열악한 조건하에서 3년간의 투쟁 끝에 쟁취한
혁명의 승리이며,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은 문화대혁명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
당시의 어려움은 꼭 해결 될 거라는 낙관주의 사고방식 때문에 견뎌냈다고 하였다.
이러한 철학으로 3번의 실각과 ‘문혁’ 과정 중 당한 사랑하는 자식의 불행 앞에서도 정적을 원망하기
보다는 조국의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그리고 본인께서 희망하신 홍콩반환 시점인 1997년까지 사시고, 한 줌의 재로서 중국인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녹아 들었으니, 한 인간으로서도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한 두 권의 책을 읽고서 ‘작은 거인’에 대해 설명 할 수 있겠는가?
단지 중국 주재 십수년 동안 ‘상전벽해(桑田碧海)’ 라는 중국 성어를 몸으로 직접 경험하게 해준
그분에 대한 자기 해석일 뿐이다.
한 사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덩 선생 본인께서 언급 하였듯이 ‘잘한 일’ 과 ‘못한 일’에 대해 역사가들
이 평가할 일이지만, 살아서 보다는 죽어서 후손들에게 덕을 베풀 수 있다면 우리가 꿈꾸는 지도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언급된 위대한 지도자 상이 생각난다.
최상의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뿐이며, 그 다음 단계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가깝게
여기고 기리며, 그 다음의 통치자는 두렵게 여기며, 최악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모멸한다”라고 했다.
한반도의 영웅 출현을 바라며
20세기 잠자는 호랑이에서 비상하는 용으로 중국을 변모시킨 덩샤오핑 선생.
모든 사람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난국 속에서 10년, 30년, 그리고 50년 후 나라의 청사진을 마치
활동사진을 찍어내듯이 그려낸 덩 선생의 혜안은 어디서 얻은 것일까?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비정한 정치 투쟁의 장에서 획득한 권력을 두고 정적을 포용하고,
자신을 낮추며, 권력과 탐욕의 유혹을 극복하고 “이루면 떠난다”는 겸손함과 초연함은 무엇으로부터
체득한 것일까?
2012년에는 대한민국, 중국, 미국 등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교체되는
중차대한 시기라고 한다.
이러한 변화의 길목에서 우리나라에도 본인 및 소속 집단의 영광과 성공보다는 나라의 대계를 먼저
생각하고, 현시대에 나라 전체를 새롭게 바꾸겠다는 거창함보다는 상식적인 범위 안에서 기존의
질서를 인정하면서 단계적으로 변화를 주며, 말보다는 솔선수범으로 국민을 따르게 하는 덩샤오핑
선생 같은 지도자가 선출되기를 바란다. (jgkim122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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