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중국과 친해지기

중국인 이해하기 (2)

주님의 착한 종 2009. 4. 21. 19:56

4. 의심과 不信<불신>
흔히들 중국사람하면 신용의 대명사쯤으로 알고 있다.  

중국인들은 신용을 중시한다. 그러나 한번쯤 곱씹어 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과연  중국인들은 누구나 신용을 잘 지키는 것일까?.  

그리고 신용을 중시하지 않는 민족도 있단 말인가.

중국은 오래 전부터 신용을 중시해왔다.

孔子(공자)도 신용을 무척이나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의라고 했다.

먹는 것을 「하늘」처럼 여겼던 중국 사람들이었지만 

신의를 더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의는 孝悌忠禮義廉恥 (효제충예의염치)와 함께 인간이 지녀야 할  

8가지 덕목중의 하나였으며 이중 하나라도 어기는 것을 군자의 커다란 수치로 여겼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추측할 수 있다.

 

즉 孔子(공자)가 신의를 강조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가  그만큼 신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신의의 반대는 불신이며 그것은 곧 의심을 낳는다.

그래서 신용을 중시했던 만큼 의심도 그만큼 심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한국의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옛날 춘추시대  鄭(정)나라의 武公(무공)은  호시탐탐 옆에 있는 胡(호)나라를 노렸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딸을 호왕에게 시집보냈다.

호왕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과연 호왕은 정나라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공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한번은 무공이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어느 나라를 칠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꽌치쓰(關基思<관기사>)라는 충신이 호나라를 지목했다.
무왕은 사돈 나라를 어떻게 칠 수 있느나며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래서 호왕은 더욱 정나라를 믿고 안심했다.
결국 무왕은 호나라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역시 춘추시대 宋(송)나라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비가 와서 어느 부자의 담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들은 빨리 담을 쌓지 않으면 도둑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똑같은 말을 옆집의 영감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밤 정말로 도둑이 들었다.
그러자 그 부자는 자기의 아들은 선견지명이 있다고 칭찬한 반면,

옆집 영감은 도둑으로 잔뜩 의심했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반 백성들은 어떤가.

열심히 농사를 지어 놓으면 천재지변이 일어 쓸어가 버린다.
다행히 이를 면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면

이번에는 가혹한 관리의 수탈이 기다리고 있다.

믿을 것은 하늘도 사람도 아니었던 것이다.
최초로 중국의 통일한 천자는 泰始皇(태시황)이었다.

이제 중국은 그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위업은 거저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피를 흘린 대가가 아니었던가.

어렵게 쥔 천하를 누군들 쉽게 내놓고 싶겠는가.
천년 만년 지키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자니 믿을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자식도 못 믿을 판이니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천자치고 높은 베개 베고 편안하게 잘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신하는 어떤가.

천자의 총애를 다투다 보니 자연히 아첨과 시기가 뒤따랐다.

몰론 현명한 천자라면 시비곡직을 가릴 줄 알아야겠으나

역사상 그런 천자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신하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천자가 더 많았으며,

심하면 일부러 농간을 부추겨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이용하게도 했다.
그러니 신하들도 잔뜩 의심할 수 밖에.


통치자 계층에서 있었던 의심의 상징이 인질이다.

서로의 약속을 믿지 못해 사람까지 담보물로 삼았지만

그렇다고  신의를 꼭 지킨 것을 결코 아니었다.

정권을 위해서는 자신의 혈육도 희생물로 삼았던 경우가 많았다.
의심 또는 불신의 극치는 뭐니뭐니 해도 宦宮(환궁)이 아닌가 싶다.

궁중에는 많은 궁녀들이 있다.
그러나 남자도 있어야 했으므로 자연히 「일(?)」이 없을 수가 없었다.

특히 여인들이 아름답고 보니 그런 일은 다반사였다.
그러니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건의 재발을 根絶(근절)시켜야 했는데

방법은 글자 그대로 「뿌리채 뽑아 버리는」수밖에 없었다.
앞에 든 사례들은 대부분 이미 없어진지 오래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있다.

도장이 그것이다.
옛날 공문서를 보낼 때 문서수발병이 행여나 내용을 뜯어볼까 「의심」스러워

사용했던 것이 도장인데 요즘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같은 관습은

우리에게도 전해져, 서양사람들이 간편하게 사인을 하는  반면

우리는 반드시 도장을 찍어야 믿는다.

한국인들은  한걸음  더나가서  인감도장이있다던가?

모두 불신의 상징인 것이다.


5. 현실(실속)과 미엔쯔(面子<면자>)
중국사람들은 매우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현실을 중시하는 민족이다.

중국인들은 콩쯔(孔子<공자>)라면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 지성으로

추앙하는데 이들의 현실중시 경향은 그의 영향을 받았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

모두 흔히들 콩쯔는 케케묵은 문자나 즐겨 사용하며 예의니 효도니 따위의 

말만 하는 「고리타분한」존재쯤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는 귀신이니 도깨비등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일체 언급조차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하늘」이니 「죽음」까지도 논하려 들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것은 곧 「비현실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강조한 모든 것들은 현실과 밀착된 것들, 

예들 들어 교욱, 부모 섬기기, 수양하기, 음악듣기, 교제하기 등등이었다.
사실이지 고리타분한 존재는 콩쯔나 멍쯔(孟子<맹자>)가 아니라

라오쯔(老子<노자>)나 쫭쯔(莊子<장자>)인 셈이다.
그들의 글을 보면 얼마나 황당무계한지 쉽게 드러난다.
『道(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이름이 아니다』
『북쪽 바다에 곤(鯤<곤>)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그 크기는 수천리가 넘는다』


라오쯔와 쫭쯔의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이 얼마나 뜬 구름잡는 소리인가?    

중국은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신화의 재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신화가 거의 발달하지 못했으며,

또 신화를 바탕으로 발달하는 소설도 덩달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신화나 소설은 모두가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콩쯔가 배척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을 중시하는 중국사람들에게는 먹는 것이야말로 「하늘」과 같은

존재였으며 모든 것은 먹는 문제로 귀착되었다.
훌륭한 통지자란 민주정치를 실시했던 천자가 아니라 먹게 해줄 수 있는 천자를 말했다. 중국사람들이 역시 「하늘」처럼 떠받드는 堯(요)임금과 舜(순)임금도 민주정치를

해서가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천지와 인간을 창조했다는 신보다 堯舜(요순)임금을

훨씬 더 존경한다.   한국인들이  단군할아버지를 숭배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중국에서 먹는 것을 완전하게 해결한 것은 1949년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의 일이므로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동안 「조용」했던 것은 이념의 문제도 있겠지만 기본적인 「현실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했던 마오 쩌 뚱(毛澤東<모택둥>)의 통치력이

뒷받침된 것이다.
중국사람들의 현실중시경향은 쉽게 드러난다.

복잡한 형식이나 겉치레를 싫어하며 내용을 중시한다.
그들이 지내는 제사를 보면 절차가 우리보다 훨씬 단순하다.

「겉보다는 실속」인 것이다.

마오 쩌 뚱이나  쪼우은라이(周恩來<주은래>), 떵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양복입은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중국인들 흔히 하는 말이 있다.
『麻雀雖小(마작소소), 五臟俱全(오장구전)』(참새가 작아도 오장은 있다)
중국인들에게는 있고 없음이 중요하지 어떤 것이 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요즘 불고 있는 이른바 「실용주의」라는 것도 중국인들에게는 결코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과거 몇십년 동안 현실보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웠던 데 대한

일종의 반대용어일 뿐이다.


등소평의 실용주의노선은 그래서 보다 더 중국적인지도 모른다.
중국사람들은 체면을 중시한다.

그래서 『중국의 성격』이라는 책을 쓴 바 있는 영국의 전도사 아담 스미스는

중국사람을  이해하는 관건으로 체면을 들었으며,

린위탕(林語堂<임어당>)같은 이는 『내 나라네 국민』(吾國與吾民<오국여오민>)

에서 중국을 지배하는 세 여신으로 체면, 운명, 은전(恩典<은전>)의 여신을 들었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체면의 여신이라고 했다.   

중국의 문화를 주도해온 사상은 콩쯔로 대표되는 유가였다.

그런데 유가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현실을 중시한다.
그래서 내세가 없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인데, 불교처럼 내세를 앞세우면

인심을 모을 수도 있으련만 유가에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바로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게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면 육신은 죽되 정신을 죽지 않는다고 보았다.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의 이름은 물론 조상의 이름까지 드날리는 것(立身揚名

<입신양명>)이야말로 효의 극치라고 했다.
명분이니 명예라는 말은 그레서 나왔다.
그런데 名(명)은 다분히 정신적인 이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육신을 나타내는 이름은 무엇일까 ?
그것은 바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얼굴이다.

곧 얼굴은 육신의 실질적인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얼굴도 명예와 함께 중시했다.


「경을 친다」는 말이 있다.

경이란 이마에 먹물을 들이는 형벌로 참형 다음 가는 중형이다.   

평생 얼굴을 들 수 없게 하는 형벌이었던 것이다.
또 厚顔無恥(후안무치)라는 말도 있다.

얼굴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체면을 닦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서,

실제로 중국에서는 그런 사람에게 얼굴가죽을 벗기는 형벌을 가했다.

너무 두꺼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얼굴은 육신의 상징으로 중시되었다.

우리나 중국이나 지금도 경찰에 체포된 범인이 얼굴부터 가리는 것도

이런 데서 연유한 것이다.
체면을 중국어로 미엔쯔(面子<면자>)라고 한다. 곧 얼굴이라는 뜻이다.

워낙 미엔쯔를 중시했던 민족이었던 만큼  체면 때문에 죽음을 자청했던 경우도 많다.

周(주)나라가 서자 불사이군을 외치면서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기를    

자청했던 뽀이(伯夷<백이>)와 수치(叔齊<숙제>)도 사실은 체면 때문이었으며,

료우빵<劉邦<유방>)에게 패주를 거듭하던 샹위(項羽<항우>)도 도망치면

목숨만은 부지할 수가 있었지만 체면 때문에 烏江(오강)을 건너기를  거부하고

자결을 선택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건넌단 말인가』.

總理衙門(총리아문)이라면 청나라때 외교를 담당했던 기관으로 지금의 외무부에

해당된다.
당시는 서구 열강들이 중국을 마음껏 유린하던 때였다.

 

서양사람들은 걸핏하면 총리아문을 안방 드나들 듯하면서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했다.

서양사람들이 이 곳을 출입할 때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지곤 했다.
즉 잔뜩 거드름을 피우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정문을 통해 들어간다.

정문은 곧 체면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사람들의 기세를 꺾어 놓는다.

그러나 나중에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고 나갈 때는 슬그머니 옆문을 이용했다.
구겨진 중국사람들의 체면을 다시 세워주기 위해서였다.
체면중시 풍조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실제로 중국에서 체면과 관계되는 말은 무척 많다.  

우선 체면 차리는 것을 쭈오 미엔쯔(做面子<주면자>),

남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을 께이 미엔쯔(給面子<급면자>),   

제 삼자의 체면을 봐서 부탁을 들어주는 것을 마이 미엔쯔(賣面子<매면자>)라고 한다. 「체면을 팔았다」는 뜻이다.


그뿐인가, 체면이 선 상태를 요구 미엔쯔(有面子<유면자>),

깍인 상태를 메이 미엔쯔(沒面子<몰면자>),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쯩 미엔쯔(爭面子<쟁면자>), 이상의 것들은 집대성한 것을  미엔쯔 꽁푸

(面子工夫<면자공부>)라고 한다.

일종에 「체면학」인 셈이다.

중국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미엔쯔 꽁푸」에 밝아야 한다.
그러면 중국사람들은 「체면」과 「현실」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는가.

이 두가지는 보완적이기보다는 상충되는 경우가 더 많다.
너무 체면만 차리다가는 현실의 이익을 놓치기 쉽다.

중국사람들은 양자가 상충될 때 「현실」쪽을 택한다.


즉 양자를 면밀히 검토하여 유리하다는 판단이 서면 체면도 버릴 줄 아는 사람들이

중국인이다. 그래서 상대가  아무리 의연하게 대처해도 전후좌우를 따져 유리하다고

생각되면 얼마든지 숙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지난 1983년 5월 5일, 중국 민항기사건이 발생했다.

수명의 납치범에 의해 중국의 민항기가 한국의 춘천 비행장에 불시착한 것이었다.
유사 이래 처음 경험하는 한국로서는 이 엄청난 사건에 전국이 놀랐지만 사실 

한국보다 더 놀랐던 것은 중국이었다.
그들은 다급했던 나머지 민항국장 沈圖(심도) 일행의 방한을 요청해왔다.

이때 중국외교부는 사상 최초로   한국을  대한민국(Repubulic of Korea)이라고

정식으로 호칭했다. 목전의 이익을 앞두고 체면을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도하 각 매스컴들은 흥분한 나머지 금방 한.중간에 무슨 변화라도 있을 것처럼

보도했다. 그러나 양국이 국교정상화를  이룬 것은 그로부터 만 9년 3개월이라는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작가소개 : 설봉산 (60)

중국 절강성 이우시에서 금성무역() 이사, 각종중국제품을 주문받아 보내드리는 에이전트.

시장조사, 품질관리 오다관리, 창고업무, 등 파트로형성, 글로벌 한인 커뮤니티 하이투스의

중국기자 및 해외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