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마음을 열고

불목하니

주님의 착한 종 2009. 3. 5. 12:20

불목하니

 

언젠가 성철 큰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스님의 입적을 끝까지 지켜보며 마지막까지 스님이 동무 삼았던

남루한 차림의 노인이 참 인상에 남았습니다.

그분을 불목하니라고 칭하더군요.

인터넷을 뒤져 불목하니에 대해 알아보고 틈틈이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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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밥짓고 물긷는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을 `불목하니` 라고 한다.

이문열의 자전적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서 주인공은 현실적 빈곤과

문학적 가치의 괴리 때문에 절망하여 겨울 산골을 거쳐 바닷가로 떠돈다.

화려한 문체로 이어지는 쓸쓸했던 여정과 주인공의 고뇌가 생생하던

그 소설에서 주인공이 잠시 술집에서 머무르며 하는 일이 불목하니였다.

 

소설에서는 방우라고 표현하였는데 허드렛일을 하며 군불 때는 일을 하니

절의 불목하니와 마찬가지였다.

불길에서 배화교를 연상하던 주인공...

어린 시절 아궁이 앞에서 느꼈던 내 서늘하고 환상적인 느낌과 같았을까?

여기서 주인공의 고민은 지극히 개인적인(순수문학적이라고 하는) 것이었지만,

불목하니는 불길에 자신의 방황과 갈등을 투영하는 모습이다.

의상대사가 전북 변산에 의상사를 짓고 수도하고 있을 때,

조금 떨어진 남쪽에 부설거사의 딸 월명각씨(月明角氏)가 월명암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

홀로 수도를 하고 있는 월명각씨를 위해 나무도 하고 밥을 해주는

불목하니가 월명각씨를 깊이 사모하였다.

하루는 불목하니가 월명각씨 방에 뛰어들어 하소연 하였으나

들어줄 리가 없었다.

밤마다 귀찮게 하므로 의상대사를 찾아가 상의 하였더니

대사가 `수도하는 사람도 인생인지라 어찌 사람이 음양의 이치와 자연의

섭리를 모르고 큰 도()를 알 수 있겠는가.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였다. 불목하니의 청을 한번 들어주니 불목하니는 자기 아내가 된 것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귀찮게 하는 것이었다.

월명각씨는 다시 의상대사를 찾아가 상의하니 의상대사가 크게 노하여

불을 때고 있는 불목하니를 아궁이 속에 밀어 넣어 죽여 버렸다.

이 때문에 사람을 죽인 의상대사는 생불(生佛)이 되지 못하였고,

불목하니 소원을 풀어준 월명각씨는 생불이 되어 지금도 가끔

월명암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월명각씨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불목하니는 영락없는 물욕 색욕의 우리 범부 꼴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월명각씨가 생불이 되니, 스스로 태워 부처를 만든 것인가?

소설가 황석영도 마산의 칠북사에서 불목하니로 있었다 하고,

독립지사이자 시인이던 만해스님도 백담사에서 불목하니로 시작하여

승려가 되었다.

어렵고 힘든 나라 꼴을 걱정하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화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고행의 과정으로 절에 들어가 불목하니 생활을 하니,

이문열의 고민과는 또 다른 자기 단련이었다.

조선 이조판서를 지낸 이식이 어려서 몸이 허약하여

경기도 양평에 있는 용문사에서 공부 했다.

스승인 유념스님에게서 학식과 덕행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는데,

유념스님이 연로해서 자리에 눕자 밤낮으로 열심히 노스님을 간호하며

공부하였다.

 

노스님이 “그만 자거라.” 하니,

`제가 십 년 동안이나 스님께 글을 배우고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이제 스님께서 병환이 심하시니 한 글자라도 더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다시 누구에게 배우겠습니까?`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세상 만물 중에 스승 아닌 것이 없느니라.

하찮은 짐승이나 새, 나무에게도 배울 것이 있거늘,

어찌 내가 죽는다고 걱정을 하느냐?

그러니 내가 죽은 후에도 훌륭한 스승이 나타나 가르쳐 줄 것이니라.`

 

유념스님의 병세는 더욱 위독해져 마침내 임종을 앞에 두고 이식에게

마지막으로 훈계하기를,

`아무리 초라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업신여기지 말고 배움을 청하라.`

 

이식이 이 말을 잊지 않고 그 절에서 밥 짓고 땔나무를 해주는 불목하니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계속하니 이제까지 십여 년 배운 것보다

일 년 동안 배운 것이 더 많았다.

 

그 후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고, 높은 벼슬에 올랐다.

불목하니라는 비천한 신분이지만 한가지로 평생을 살다 보면

경전과 구두선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에 모자르지 않으니,

그 또한 도통이렸다.

명나라 때 소림사에 `긴나라’라고 하는 부엌을 지키는 불목하니가

있었다고 한다. 무술에도 능할 뿐 아니라 힘이 세서, 평소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100명분의 밥을 펐다고도 한다.

원나라 말기 홍건적 무리가 난을 일으켰을 때 소림사에도 쳐들어오자

긴나라가 부뚜막에서 몸을 날려 날렵한 곤술로써 홍건적 일당을

물리쳤다고 한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화려한 소림사 주방의 명성은 이 긴나라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한낱 주방을 보는 불목하니라고 우습게 볼 일 아니다.

궂은 일 맡아 제 일을 다하매 두루 통하지 않은 것이 없을지니.

구효서의 소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에도 불목하니가 나온다.

대청호가 보이는 작은 암자에서 그는 새로운 탈출 기술을 연구하면서

불목하니로 살아가는 전직 서커스단 탈출사, 아내와 두 아이의 생활을

책임지지 못하는 `전업 작가`가 화자로 나온다.

 

원터치 캔이 등장한 후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구비하지 않고 살아가는 깡통따개.

이 소설은 그러한 깡통따개를 닮은 사람들의 존재 의미를 묻는다.

화려한 서커스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고등 기술을 연구하는 이 불목하니는

깡통따개와 함께 잃어버린, 이제 쓸모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시간과

쓸모를 되찾으려는 빛 바랜 염원이다.

옛날에 소 돼지를 잡으며 살아가던 백정이 중이 되고자 하여 절을 찾았으나

살생을 업으로 삼아온 백정을 행자로 삼을 수 없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사정 끝에 가까스로 절에서 밥짓고 나무하는 불목하니로 지내게 되었다.

누더기 베옷에 삭발한 머리를 하고 절의 잡일을 도맡아 하였으나

워낙에 무식하고 미련한 지라, 절밥 먹은 지 10년 지나도록

염불은 고사하고 불경 한 줄을 외지 못하였다.

절의 중들은 그에게 `대덕(大德)` 이란 별호를 붙여주고는 온갖 힘들고

궂은 일에 그를 부려 먹었고, 인근마을에서도 잔칫날 개 돼지를 잡거나

초상부고를 돌리는 등 힘들고 궂은 일이 있으면

으레 그를 불러 부려먹곤 하였다.

그러나 대덕은 불평 한 마디 없이 고분고분 시키는 일을 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바보 대덕`이라 부르며 놀렸다.

비가 내려 냇가에 물이 불어나면 혼자서 힘들게 징검다리를 놓고,

고된 일을 하는 아녀자나 노인이 있으면 쫓아가서 거들며,

아픈 사람이 있으면 약초를 캐다 주기도 하고,

상주가 없는 주검은 장사를 지내주기도 하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 혼자 사는 병든 노인을 간호하다가 밤늦게 산을 넘어

절로 돌아가던 중, 갑자기 쏟아진 심한 눈보라에 파묻혀 얼어 죽었다.

그러나, 아무도 대덕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시신은 산골짜기에 묻힌 채 이듬해 여름에는 무성한 잡초에 묻히고

말았다. 대덕이 없어지니 절에서는 나서서 경내를 쓸거나, 땔감을 해오는

사람이 없었고, 인근 마을에서도 귀찮고 어려운 일들을 손수 해야 했으며,

큰물이 져서 다리가 떠내려가도 누구 하나 다리를 놓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대덕이 얼마나 귀중한 사람이었던 지를 깨닫고

그가 사라진 것을 아쉬워 하였다.
대덕이 묻힌 잡초 더미에서 이듬해 봄 보리수의 싹 하나가 솟아올랐으니,

명색이 중이랍시고 대덕이 목에 걸고 다니던 염주 알 중의 하나가

싹을 틔운 것이라고 한다.

가진 자들이 베풀 줄 모르고 제 욕심만 챙기며 남 위에 군림하려 하고,

배운 자들이 해박한 지식을 지녔으되 실천하지 않으면

부와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하며 사는 사람들,

이름없는 그 불목하니들이 우리 세상을 그나마 살만하게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