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오 하느님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주님의 착한 종 2009. 2. 12. 16:16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욥 42,2 - 6) 욥은 그 동안 밖에서 문제를 보고 밖에서 문제 해결을 찾았다. 세 친구와 끝까지 논쟁을 벌이며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느님께 맞서고 하느님을 비난하기도 했다. 욥은 독침을 맞고 버둥거리는 사람처럼 몸부림쳤다. 화살맞은 맹수처럼 울부짖고 들이받으며 항의하고 싸웠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듯이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욥의 영혼은 안식을 누릴 수 없었다. 마지막 장에서 하느님을 만난 순간 욥은 자세가 180도 달라진다. 부질없는 말로 하느님의 뜻을 가렸다는 것을 고백하고 참회한다.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6절) 이제는 문제를 자기에게서 찾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욥의 태도가 이렇게 바뀐 이유를 5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욥이 하느님에 대해서 남의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끝없는 논쟁과 불평을 일삼았는데 제 눈으로 하느님을 보니 모든 의문이 풀리고불만과 짜증이 사라졌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신앙인이 있다. "누가 하느님을 만났다더라".
    "누가 기도하다가 신비한 체험을 했다더라",
    "누가 이렇게 말했다더라" 하며 믿는 신앙인이 있다.
    이런 사람은 남의 신앙체험이나 깨달음을 듣고 그런가 보다 하며 믿는 이다.
    이런 믿음은 자기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드물지만 스스로 체험하고 깨닫는 신앙인도 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신학교수가 한 분 있었다.
    촉망받는 신학자요, 출세가 보장된 학자였는데
    갑자기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장애인 시설의 직원이 되어
    장애인을 도우며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 사람의 재능과 실력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학교로 돌아오게 하려고 를 썼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신학교수로서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칠 때는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공원에서 한 장애인을 만나 도와주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고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수생활을 떠나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기로 했습니다." 흔히 신학자들은 스스로 깨닫고 체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기 신학을 펼치기보다는
    잘 알려진 신학자들의 신학을 연구하고 소개하는 데 머문다.
    남의 얘기를 하는 것이다. 또 자기가 깨닫고 이해한 신학이론과 지식이라 해도
    그것은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수준에 머물기 쉽다.
    안다고 해도 머리로만 아는 것이지
    몸으로 삶 속에서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몸으로 보고 느낄 수 없다. 그 동안 욥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5절)
    이제 드디어 하느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욥은 더이상 머리로만 생각하고 따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3절)을 보고 알게 된 것이다. 눈으로 하느님을 보니까 문제가 다 풀렸다.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삶 속에서 몸으로 느끼고 깨달았다는 말이다. 보는 게 중요하다. 우리 말에서는 본다는 말이 이해하고 인식하는 일의 바탕을 이룬다. 먹어보고, 들어보고, 만져보고, 읽어보고, 말해 보고, 생각해 본다. 보는 것은 전체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눈으로만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고 몸으로 본다. 성서에서 '하느님을 보았다'거나 불교에서
    '진리를 보았다(見性)'는 것은 몸으로 본 것을 뜻한다. 몸으로 본다는 것은 대상과 몸이 하나가 되는 경지이고
    대상을 일그러뜨리거나 한쪽만 보지 않고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욥이 눈으로 하느님을 보았다는 말이 아니다.
    만물 안에 계시고 만물 위에 계신 하느님은
    내 밖에도 계시고 내 안에도 계신다.
    하느님에게는 안과 밖이 따로 없다.
    하느님을 온전히 본 순간 욥에게는 안과 밖의 구별이 없어졌다.
    욥의 바깥 세계에도 욥의 내면 세계에도 하느님이 살아 계셨다. 믿음의 깊은 자리에 들어가야 이런 깨달음과 체험에 이를 수 있다. 편견과 욕심에 사로잡힌 유일한 존재인 인간은
    사물이건 하느님이건 온전히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한쪽만 보거나 일그러뜨려서 본다. 언제나 보는 사람의 관점이 대상을 지배하고 왜곡한다. 그래서 '바라봄의 횡포'가 저질러진다. 바라봄의 횡포에서 벗어나려면 보는 자와 대상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자유로운 깨달음의 경지일 것이다. "바다를 대상화하여 보는 자에게는
    바다가 평화 · 경이 · 장관 ·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바다와 일체가 된 물고기에게 바다는 물 · 생명의 품이다."
    (선순화) 물고기가 바다와 어우러지듯이
    우리도 바라보는 객체와 어우러질 수 있을까? 몇 해 전에 죽은, 나와 동갑내기 신학자 선순화는
    "우리의 오관인 보기 · 듣기 · 만지기 · 냄새 맡기 · 맛 보기를 통하여
    대상을 '그것' 이 아닌 나의 일부로,
    '나'로 직접 체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라보는 객체를 나의 일부로 직접 체험하는 경지는
    몸으로 보는 경지요, 몸과 몸으로 하나 되는 경지이다. 선순화는 이것을 하느님 관계에 적용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단순히 탄원과 심판의 '대상' 으로만 바라본다면
    하느님과 일체감을 이루기 힘들다.
    그러나 하느님을 내 생명의 근원, 내 존재의 근원으로 만난다면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 불교에서는 '소리를 보는[觀音]' 보살이 있다. 소리를 본다는 것은 소리만 듣고도
    그 사람이나 집안의 형편과 처지를 다 꿰뚫어보는 것이다.
    소리를 본다는 것은 보는 대상을
    보는 이의 몸과 마음 안에서 보고 느낀다는 말이다.
    욥은 자신의 몸과 마음속에서 하느님을 보았다. 하느님과 욥 사이에 이제 아무 거리낌이 없게 되었다.
    욥은 이제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를 조건 없이 긍정하고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느님을 몸으로 보고,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를 무조건 긍정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고통그럽거나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느낄 수 있다.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삶은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산다. 십자가에 달려도 살고 돌무덤에 갇혀도 산다. 그런 사람은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가 지배할 수 없다. 동양 종교사상에서는 흔히 '나'도 없고 '너(대상)'도 없는
    하나 됨의 경지를 말한다. 잘못하면 역사의 현실을 벗어나 초월의 세계에 빠질 수 있다. 성서에서도 하느님과 만나서 하나로 통하는 신비의 경지가 있다. 그러나 성서의 초월은 역사의 현장을 벗어나지 않는다. 욥은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참회한다.
    자신이 유한하고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티끌과 잿더미가 날리는 현실 세계로 들어온다.
    하느님 앞에서 참회하는 인간은
    지나온 삶의 잘못을 바로잡고 새 삶을 시작한다. 참회는 새 역사를 짓는 시작이다. 욥기 묵상 「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나다」 박 재순 지음/ 바오로딸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