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 · 공지

은혼식 날에 아내에게

주님의 착한 종 2008. 1. 8. 14:15

여보, 실비아!

1983 18,

서울은 기록적인 강추위가 몰아쳐 세상을 꽁꽁 얼려놓았고

제주도에는 큰 눈이 내려 온 세상을 덮었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정동 프란치스코 수도원 성당에서 하느님 앞에 당신과 인연을 맺고

결혼생활로 접어든지 오늘로 꼭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세월이 가져다 준 여러 가지 호칭과 직책이나 직위가,

명예로 여겨질 수 있거나 자랑이 될 만한 것이 있더라도

당신의 남편이며, 보영 루시아, 소영 글라라의 아빠라는

명칭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청실 홍실 엮어서 고은 무늬 놓은 지 어~25,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25년의 세월 동안

한결 같은 당신의 사랑이 있어서,

비단결 같이 곱기 만한 당신의 마음이 있었기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편이며 아빠로 살아왔습니다.

이런 당신을 배필로 짝 지워 주시고 함께 열심히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당신과 나의 결혼생활 25년 세월을 돌아보니

항상 기쁨과 믿음과 사랑만을 나눈 삶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만큼 아픈 적이 있었고

사랑하면서도 미워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는 신앙 안에서 주님의 성가정을 본받으려

화해하고 용서하고 상처까지 보듬으며

많은 날들을 함께 살아왔습니다.

 

하여,

주님은 우리 부부를 축복하시고 사랑하셔서

지금까지 거친 풍랑이 없는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셨고

그 동안 당신은 어느덧 내 일생의 변하지 않는 동료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훨씬 더 깊게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더 크게 당신을 이해하고 더 많은 자유를 줄 수 있음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여보, 실비아.

앞으로 두 달여 후에 정년퇴직을 해야 하는 현실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두 분 부모님과 장모님을 모셔야 하고

아직 더 커야 할 예쁜 딸들을 부양해야 하는데 벌써 정년이라니

어쩌면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어려움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를

힘든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실 요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당신은 나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주고

나에게 살아야 하는 분명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나도 든든한 당신의 남편, 효성스러운 큰 아들, 착한 사위,

자랑스러운 아빠, 신실한 교우의 몫을 다 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당신이라는 사람이 함께 하기에 나는 언제나 삶의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그 자리에 서서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봐 주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실비아!

지금 이 시간 25년의 모든 사랑과 보람을 당신께 바칩니다.

그리고 또 다시 맞이해야 할 많은 날들도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의 나날이 되기를 빕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끝없는 우리의 사랑과 평화가 함께 하리라는 것도

굳게 믿습니다.

 

여보, 실비아!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늘 은혼식 날

당신에게 줄 선물이라고는

진심을 담은 나의 이 고백밖에 없습니다.

 

여보, 미안했어요!

여보, 고마웠어요!

여보, 사랑해요!

하느님!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2008. 1. 8일 은혼식 날에

남편 글레멘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