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마음을 열고

어느 노인의 편지

주님의 착한 종 2007. 10. 10. 07:42
[부일시론] 어느 노인의 편지 / 이해인 수녀·시인
 
 
차츰 노인인구가 많아지면서,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우리에겐 근심도 그만큼 많아졌다.
노인을 모시고 섬기는 일 자체를 힘겨워하는 단체나
가정들도 더 많아졌다.
끝까지 사랑과 정성을 다하려는 우리의 노력에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때로 생각없이 던지는 냉정하고 무자비한
말로써 '오래 사는' 이 땅의 노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심한 건망증으로 종종 정신없는 행동을 하더라도 완전한 치매환자는 아닌
노인들이 존경은커녕 인격을 비하하는 막말을 들을 적엔 얼마나 서운할까?
더구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딸들의 입을 통해서 그런 말을 들을 땐
겉으론 내색도 못하고 아마 속으로만 울 것이다.
안 그래도 '오래 살아' 미안하고 눈치가 보이는 그에게 은근히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듯한 말이 들려올 땐 얼마나 비참한 심정이 될까.

어느 날 이분들의 입장이 되어 시를 적어보았기에 소개하려 한다.
늙음 자체만으로도 힘겹고 고독한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노인들을 향한
우리의 맘씨와 말씨가 좀 더 유순하고 친절해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들 딸들, 그리고 나를 돌보아주는 친절한 친구들이시어
나를 마다 않고 살펴주는 그 정성/나는 늘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대들이 나를 자꾸만 치매노인 취급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교육시키려 할 적마다 마음 한 구석에선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그냥 조금 기억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없어진 것 뿐인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오.

제발 사람들 많은 자리에서 나를 갓난 아기 취급하는 언행은
좀 안 했으면 합니다

아직은 귀가 밝아 다 듣고 있는데 공적으로 망신을 줄 적엔
정말 울고 싶답니다.
그리고 물론 악의 없는 질문임을 나도 알지만 생에 대한 집착이 있는지
없는지 은근 슬쩍 떠보는 듯한 그런 질문은 되도록이면 삼가 주면 좋겠구려.
어려운 시험을 당하는 것 같아 내 맘이 편칠 않으니...

어차피 때가 되면 생을 마감하고 떠나갈 나에게
떠날 준비는 되어 있느냐, 아직도 살고 싶으냐
빙빙 돌려 물어 본다면 내가 무어라고 답을 하면 좋을지?

더 살고 싶다고 하면 욕심 많은 늙은이라 할 테고
어서 죽고 싶다면 우울하고 궁상맞은 푸념쟁이라 할 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의 숨은 비애를 살짝 감추고 사는 지혜가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여 내가 가끔은 그대들이 원치 않는
이기적인 추한 모습, 생에 집착하는 모습 보일지라도,
조금은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이지요.

하늘이 준 복과 수를 다 누리라 축원하고 오래 살라 덕담하면
좋다고 고맙다고 겉으로는 웃으며 대답하지만
속으로는 나도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평온한 죽음을 맞게 해 달라
간절히 기도하고 있음을 알아 달라고
오늘은 내 입으로 꼭 한 번 말하고 싶었다오.

그러니 부디 지상에서의 나의 떠남을 너무 재촉하지는 말고
좀 더 기다려 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나를 짐이 아닌 축복으로 여겨 달란 말은 강조하지 않을 테니
모든 것을 시간 속의 섭리에 맡겨 두고
조금 더 인내해 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빚진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는 뜻으로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어설픈 편지라도 쓸 수 있으니
쓸쓸한 중에도 행복하네요.

어쨌든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내 처지에
오늘도 미안한 마음 감출 수가 없지만
아직은 이렇게 살아있음이
그래도 행복해서
가만히 혼자 웃어봅니다.

이 웃음을 또 치매? 라고 하진 않을지 걱정되지만
그래도 살짝 웃어봅니다'

 

 

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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