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중국과 친해지기

[스크랩] 중국에서 자녀교육을 시켜보니..(초등학교)

주님의 착한 종 2007. 9. 22. 13:49

우리 큰애가 중국에 올 때 나이가 5살이었습니다.

겨우 일상적인 한국말을 조금 할 때 였지요.

벌써 20살이 되었군요.

처음엔 남들보다 먼저 중국어를 습득하고, 중국을 뿌리깊게 이해하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장차 커면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절대 손해는 없을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기대는 맞았습니다.그러나 세상사 모든일이 그렇듯 댓가없는 소득은 없는법인가 봅니다.

 

올여름 고등학교 졸업 하자마자 한국대학 진학 준비차 귀국을 시켰는데,

꽤 괜찮은 대학의 수시모집에 특례로 합격을 했다고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신기합니다.특례가 좋기는 좋은모양입니다.

그것도 12년 특례는 외국인으로 인정되어 실력은 잘 평가해 보지 않나봅니다.

아마 한국에서 초중고를 마쳤다면, 4당5락이 적용되어 머리 싸매고 공부만 해야 했지 않았을까.

 

큰애를 중국에서 교육시키면서,

장점이라면, 한국처럼 온 가족이 달라 붙어 좋은대학 보낼려고,아둥바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그런 풍토에 휘둘리지 않은것은 크나 큰 장점이었습니다.

문제는 단점인데, 이것은 장점보다 더 심각하고 뿌리깊구나 하는것을 느낍니다.

바로 적정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환경적응 능력이 결핍된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사회성을 세우는데 본인 스스로 많은 도전을 받을것이며,또 투자를 해야할 것입니다.

 

지나온 길을 거슬러 가 보겠습니다.

 

중국에 오자마자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5살은 아직 어려 잘 안 받아주는데, 외국인이라 특별히 받아주었습니다.

당시,유치원은 합법적으로 설립된 사설기관은 없고, 모두가 집체단위 소속이었습니다.

즉, 단위(기업)에서 세운 유치원이지요.

원래는 기업임직원들의 자녀만 보내는데, 운영을 위해 외부인도 받고 했습니다.

 

첫날 등교시, 유리창문으로 들여다보니..

강당에서 신입아이들을 세워놓고 줄을 세우는데,

줄이 맞지않는 아이들을 선생님이 사정없이 그 큰 손바닥으로 머리를 퍽퍽 치는게 보입니다.

기겁을 했습니다.핏덩이 같은 저 어린 아이들을...

 

신기한건 중국학부모들은 당연한듯 덤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소황제라해서 집에서는 황제처럼 받들지만,

선생님과 함께하는 조직생활에 대해서는 냉혹하리만큼 수긍을 합니다.

우리애야 무슨말인지 못알아들으니,눈만 멀뚱멀뚱,두리번 두리번...

며칠간 왠일인지 애가 유치원에 갈 시간이면, 일부러 늦게 갈려고 핑계를 만듭니다.

느적느적 하다가 엄마에게 야단을 맞고서야 할수없이 대문을 나섭니다.(가기가 그리 싫었나봅니다.)

 

며칠 보내고, 땡 했습니다.

가정집에서 주위 아이들 대여섯명을 모아, 하루종일 돌보아주는 집이 있었습니다.

통상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이 돌보는데,말하자면 사설 유치원인 셈입니다.

그날부터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꼭두새벽부터 먼저 설칩니다.

희안하게도 몇개월 되지않아 중국어를 제말처럼 잘 합니다.

자세히보니 그애에겐 한국어,중국어 구별이 없었던 것입니다.

한국어로 물으면 자동으로 한국어로 대답하고,중국어로 물으면 무의식적으로 중국말로 대답하고..

두나라 말을 이것저것 뒤섞어 같은 언어로 생각하는듯 합니다.

 

2년동안의 적응기간을 거쳐..

공립 초등학교에 넣기에는 뭔가 부족할듯하여, 집 근처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등록금외에 외국인의 입학기부금이 25,000위엔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국학생이 많이 없던때라 완전 중국인이 다 되었지요.

허나, 입학한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치원 시절은 가정집이라 큰 불편이 없었으나,,

학교의 화장실을 보고는 도저히 볼일 볼 생각이 나지 않았나봅니다.

그 당시 사립학교라서 조금 깨끗하다해도 우리기준으로는 한참 뒤떨어져 있었지요.

학교에서는 억지로 참고, 하교후 집에서 볼일을 보더니..

결국,변비에 걸려 이후 10년동안이나 고생을 했습니다.

 

2년까지 다니고, 그 학교가 멀리 벽지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집근처의 공립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켰습니다.

기존학교에 지불한 기부금은 6년으로 나누어 안 다니는 나머지 기간것은 받아내었습니다.

 

공립은 학비가 엄청 쌌습니다.

아마 한학기에 600위엔인가 했을겁니다.

전학을 한 그 학교엔, 한반에 한국학생이 두세명 정도 있었습니다.

한국학생은 중국말을 잘 못 알아들어 수업은 건성이었지요.

따라서 우리애는 중국동학들과 어울리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여기서 문제의 소지가 발생했습니다.

한국학생들은 중국에 온지 갓 일년이하 인지라, 티가 나게 되어있습니다.

중국학생들과 어울리지못하는 우리만의 생활습관을 갖고있는 아이들인 것입니다.

당연히 중국아이들과 한국아이들간의 이질적 간격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중국아이들은 한국아이들을 경원시하고,질투하는 현상이 생기고..

한국아이들은 거꾸로 중국을 무시하고,하류라는 인식을 갖고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간에 양쪽말을 다 알아듣는 우리애가 끼여있는 형국이 되고말았습니다.

 

우리애는 한국애들의 수준을 이때까지 접하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당시 청도에 나와있는 다른 가정의 동년배 아이들과 같은 정도의 어울림이었지요.

그러나,피는 어쩔수없나 봅니다.

같은 학교의 한국아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점차 늘어가더니..

종내 중국아이들과의 교류가 단절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댓가를 본인이 치룬걸로 기억합니다.

 

중국동학들은 그나마 언어소통이 되는 그를 찌지고 볶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왕따가 시작된것입니다.(중국도 그룹별 왕따는 우리못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6년동안 그가 잃어버린 시계만도 대여섯개가 됩니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꼼꼼한 그가 절대 잃어버릴 일이 없다는것을...

무릅이 까져 돌아온 적도 한두번이 아닙니다.맨날 넘어져서 그렇다고 합니다만,

이제까지 당해보지 못한 환경변화를 겪어갔던 것입니다.

 

그때부터,무서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갓 중국에 온 아이들은 언어소통문제로 중국아이들과의 교류에 완충지대가 있었습니다.

즉,가까이 하지는 않는 일종의 이국적 신비감으로 그런대로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을 합니다.

중국아이들도 말도 안 통하는 아이들에게 시비 걸어봐야 별 소득이 없다는 걸 잘 압니다.

또 한국아이들은 그들과 깊숙하게 어울려 보지않아 각을 세워 적대시 할 일이 별로없습니다.

 

허나, 우리애는 갓 온 한국아이들보다 더 강한 적개심을 중국동학들에게 서서히 느끼고 있는듯했습니다.

중국에서 그리 오래 살았는데, 다른 아이들보다 중국에 대해 더 친근감을 가져야 정상일텐데..

자신은 한국인이며, 갓 온 한국아이들의 정신세계를 접하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까진 좋으나,

문제는 우월적사고가 그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다른 아이들보다 더 크게 편가르기를 하는게 보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계속-

출처 : 칭다오 도우미 마을
글쓴이 : 스프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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