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마음을 열고

[스크랩] 봉평메밀밭

주님의 착한 종 2007. 9. 14. 10:04

가을이다.


가을하면 먼저 숨막힐 것 같은 하얀 메밀밭이 떠오른다. 그것도 커다란 보름달이 뜬 메밀밭이다. 탐미적 직관이 탁월했던 이효석이 우리에게 메밀밭의 기적을 뿌렸다. 요즘 들어서야 길이 훨씬 수월해졌지만 산자락과 개울에 의지해 살던 봉평사람들은 이웃면과 왕래하려면 좁은 산허리를 넘고 거센 여울도 건너야 했다. 육칠십리 밤길을 타박하지 않으면 서로 교통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오가던 길에서 ‘보름이 지나 이지러는 졌으나 여전히 부드럽게 흐르는’ 달빛에 촉촉이 젖어든 메밀꽃밭은 더욱 하얗고 흐드러져 보였을 것이다.

탐미적 직관이 탁월했던 봉평사람 이효석도 이 아름다운 풍광을 놓쳤을 리 없다.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있지. 거기서 난데없이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일세.’

드팀전(피륙가게) 장돌이면서 얼금뱅이 허생원이 봉평에서 대화장 가는 산허리 밤길 때마다 조선달에게 들려주는 물레방앗간 인연도 달빛 탓이고 젊은 시절 ‘꼭 한 번의 첫일을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것 역시 숨이 막힐 듯 새하얀 메밀꽃밭이다.
이제 봉평에서 소설 속 옛 모습을 그나마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은 메밀꽃밭 뿐이다.

그래도 다행스럽다. 메밀꽃밭이 있어 우리는 해마다 가을이 오는 길목이면 봉평과 이효석 문학을 그리워할 수 있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허생원 일행이 숨을 헐떡거리며 넘던 노루목 고갯길엔 고속도로가 뚫렸고 등에 밴에 땀을 훔치러 ‘고의를 벗어 띠로 등에 얽어매고 반 벌거숭이의 우스꽝스런 꼴로 뛰어 들었던’ 고개 너머 여울목엔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졌다.
괜스런 아쉬움이 남아 소설의 정취를 느끼러 메밀꽃 풍경 안으로 들어가 봤다.손바닥을 간질이는 하얀 꽃들이 눈앞에서 다시 한번 흐드러진다.

강원도 평창군 산자락에 걸친 작은 면(面)인 봉평은 9월초 이맘때쯤이면 더 이상 산골이 아니다. 메밀과 더불어 이효석 문학이 하얗게 꽃을 피우게 되는 이 시기마다 봉평은 소금을 뿌린 듯이 피는 메밀꽃과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 한 장돌뱅이의 삶과 과거 흔적을 쫓는 공간이 된다.

◆봉평 초입.
잘 닦여진 도로 양편으로 하얀 메밀꽃이 활짝 폈다. 길을 따라 들어서니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봉평 재래장터’라는 푯말이다. 물레방앗간에서의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 된 허생원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된 봉평장, 그 소설 속 무대다.

‘여름 장이란 애시 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지만 장판은 쓸쓸하고 더운 햇발에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칩칩스럽게 날아드는 파리 떼도 장난군 각다귀들도 귀찮다.…’
그렇게 시작되던 봉평장(2,7일)의 풍경은 아쉽게도 예스런 분위기는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지금도 장날이면 난전이 형성돼 이문을 좇는 장꾼들과 장보러 온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생각만 하여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 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 소스라쳐 버리던’, 충주댁을 향해 허생원이 한없는 연정을 느꼈던 주막 충주집은 회색 콘크리트 벽 한 쪽에 표지석만 달랑 남아 있다. 이효석문학선양회에서는 봉평장터 옆 가산공원에 초가주막인 충주집을 재현해 놓았다.

◆이효석의 문학을 더듬으며
아담한 터에 이효석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가산공원에는 그의 흉상과 문학세계를 정리한 표지석이 있다.

가산공원 옆으로는 물 맑은 흥정천이 흐른다. 충주댁을 후린 눈치에 화가 난 허생원에게 면박을 받았던 청년 동이가 그를 업고 건너던 개울로 묘사된 곳이다. 지금은 개울 위로 다리가 놓여져 있지만 문학제 기간엔 다리 아래로 섶다리, 나무다리, 징검다리가 놓인다. 특히 섶다리는 소나무로 교각을 놓고 그 위에 솔가지와 흙을 덮은 다리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출렁거리는 느낌을 만끽할 수 있다. 옛 삶의 정서를 더듬어 볼 기회가 된다.

흥정천을 건너 둑에 올라서면 왼편으로 초가정자 3동과 메밀꽃밭이 조성된 테마포토존이 있고 그 맞은편에 물레방앗간이 있다. 물론 당시의 물레방앗간은 아니지만 소설 속 무대로서 봉평과 이효석의 문학 이미지를 표현하는 중요 상징물 중 하나다.

애끓는 첫 정분의 장소였던 물레방앗간에서 걸어 15분 쯤 거리에 가산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생가 터가 자리하고 있다. 주변 산자락과 밭을 둘러보면 온통 메밀밭이다. 현재 그의 생가는 이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3칸 함석기와집에 창고와 행랑채가 딸린 구조로 가산문학의 산실을 복원해놓았다는 상징적 의미를 빼면 실제로는 그리 볼품이 없다.
하지만 어릴 적 가산이 경험한 봉평 땅의 아름다운 경치와 순수한 시골인심이 후에 주옥같은 영서(嶺西) 3부작 ‘메밀꽃 필 무렵’, ‘개살구’, ‘산협’의 토대가 된 것 같다.

◆메밀밭을 지나
생가 앞 메밀밭에서 갓 피기 시작한 하얀 꽃과 잎들이 초야를 맞은 신랑각시 가슴처럼 떨리고 있다.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는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이야.…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독백처럼 들리는 허생원의 말을 통해 작가는 심미적 문학세계관과 순박한 성 본능의 탐구를 문학적 필치로 그려낸 건 아닐까. 생가와 가까운 이효석문학관에 들려면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문학관은 심미주의자로서 섬세한 감각을 소유자이며 모더니스트이기도 했던 이효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시간의 흐름에 맞춰 볼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다. 유품과 초간본 책, 그의 작품이 발표된 잡지와 신문 등이 전시돼 있으며 옛 봉평장터 모형도 볼 수 있다. 15분간 상영되는 영상물은 봉평과 진부 등 소설의 주무대가 된 지역특성과 간략한 작품 줄거리도 들려준다. 문학관 밖은 정원과 메밀꽃길, 오솔길 등이 다채롭게 꾸며진 문학동산을 연상하게 한다.

◇봉평 인근 둘러볼 만 한 곳
◆평창 무이예술관=2001년 개관된 무이예술관은 폐교를 이용한 작가들의 작업실과 오픈 스튜디오로 활용되는 곳이다. 보고 만지고 느끼고 함께하는 체험공간인 야외조각공원엔 다양한 인체들의 갖가지 자세가 조각돼 있다. 이효석 생가에서 효석문학길을 따라 가면 이정표가 보인다.

◆허브나라=봉평의 맑은 흥정계곡을 따라 20여분 달리면 있는 곳으로 자연 속에서 허브를 체험하는 편안한 가족 쉼터로 안성맞춤이다. 식용, 약용, 염색 등 여러 용도로 쓰이는 많은 허브와 이색 꽃들이 잘 가꿔진 정원 속에서 테마별 관찰을 할 수 있으며 허브를 이용한 요리도 맛 볼 수 있다. 자작나무로 지은 펜션이 딸려 있어 꿈같은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봉평 가는 길=중앙고속도로 만종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진입한 후 장평 IC에서 내린다. 이 곳에서 6번 국도를 타고 20여분 가면 봉평이다.

출처 : 중년정보공유
글쓴이 : 로하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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