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안식/호스피스 일기

호스피스 일기 (9) -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 (1)

주님의 착한 종 2007. 9. 5. 08:57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에요.

 

 

“네가 수정이니? 내가 원장 신부란다.

“안녕......하세요?

힘없이 숨을 할딱이며 고개만 간신히 돌려 인사를 하는 앳된 소녀가

누워 있었습니다.

많이 야위었지만 쌍꺼풀이 진 예쁜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무거운 쇳덩이가 가슴에 얹혀 있는 듯한 숨을 쉬기에

이상해서 이불을 들추어보았습니다.

그런 호흡은 임종이 시작될 무렵에 나타날 수 있는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이불을 들추자 끔찍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양쪽 겨드랑이에는 아이의 머리만한 암 덩어리가 두 개나 달려 있었고

그곳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섞인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19살 된 고3의 어린 가슴에는 전이된 암으로 인해 커다란 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은 암이 자리하고 있었고, 배와 옆구리 쪽에도 주먹만한

크고 작은 3개의 암 덩어리가 달려 있었습니다.

 

마치 아이의 몸무게보다도 암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몸이 많이 야윈 상태에서 보이는 곳이 전부 암 덩어리만 있었으니

지금까지 이렇게 드러나도록 많이 전이된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이가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클지 ......

호흡 소리가 그렇게 들렸던 것은 커다란 암 덩어리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이를 악물고 간간히 신음소리만 낼 뿐 잘 참아내고

있었습니다.

 

옆에서는 엄마가 지친 모습으로 아이의 팔 다리를 주무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엄마......하지마......힘들잖아......엄마......팔 아퍼......!

“아니야, 난 괜찮아! 괜찮대두 이 자식아......

 

아이는 그 아픈 와중에서도 오히려 엄마의 팔이 아플까봐 걱정을

하였습니다. 어른도 참기 힘든 암 통증과 죽음의 두려움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엄마를 더 걱정하는 아이를 보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애절함에

코끝이 찡해왔습니다.

 

이제 겨우 19......

한창 꿈 많고 수줍어할 나이인데,

친구들은 고3 수능 준비하느라 정신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 아이는 근육육종이라는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진통제를 맞고 겨우 잠든 아이를 보면서 엄마는 딸의 손을 쓰다듬으며

지난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1986 8월에 3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아이는 아기 때부터 쌍꺼풀에

눈이 동그란 아주 예쁜 아이였습니다.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지만 집안이 넉넉하지

못 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늘 나가서 돈을 버는 데 시간을 보내야 했고

동생들에게 엄마 대리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엄마가 집에서 해야 할 몫을 큰 딸아이가 다 해주었기 때문에

동생들은 사실 공짜로 키웠습니다.

동생들은 맏이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습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집을 비우는 동안 동생들에게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며 TV보는 시간, 오락하는 시간, 공부하는 시간을 정해놓고는

그대로 따라 하도록 시켰고 좀더 크면서는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가정형편에 맞게 용돈을 써야 한다.

 

친구들하고 있을 때에도 눈치 봐가며 절제해야 한다는 등

애답지 않게 엄하게 가르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생들에게 자주 화를 내서 어린 가슴에 상처를 준다며

자신의 이런 단점을 고쳐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이야기 하면서 엄마는, 뒤척이는 아이를 토닥여 주며 그렇게 했던 딸이

대견한 듯 엷은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습니다.

 

딸아이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공부 욕심이 많아서 뭐든

제일 잘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이침 7시에 학교를 가면 밤 11시가 되어서야 집에 오는데 늘 책을

끼고 다녔고 화장실 갈 때나 길을 갈 때에도 공부밖에 몰랐습니다.

휴식시간 5분도 아깝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인지 학원에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었지만 늘 1,2등을 다투었고

예체능 쪽에도 재주가 많아 노래나, 그림 그리기, 무용 같은 것에서도

인정을 받아 대표로 발탁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딸아이를 보면서 엄마는 삶이 힘들어도 힘든 줄을 모르고 보람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늘 긴장하고 잘하려고 해서인지 몰라도 어릴 때부터 배

아프다는 소리를 자주했습니다.

병원에 한번 가려고 해도 시간이 안 되어 못 갔는데 그게 화근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부터인가 목 밑에 조그만 혹이 하나 생겼는데 세월이 지나면

없어지려니 하고 방치를 했습니다. 더 이상 커지는 것 같지도 않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하루는 이빨이 아프다고 해서 치과에

갔습니다.

 

그런데 치료 중에 이빨을 하나 뽑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출혈을

심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출혈을 많이 할 이유가 없었다고 하는데

치과 선생님도 큰 병원에 가서 한번 진찰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종합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이것저것 검사하다가 목 밑에 혹을 발견하고 조직검사를 해보니

암이라는 거예요.

병명은 근육육종이라고 했습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설마 했지만 그래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어린 것이 무슨 암이라고, 설마 오진이겠지 싶어 다른 병원에 가서

재검진을 하려고 했는데 친척 중에 의사 한 분이 오시더니 다른데

가봐야 똑같고 얼른 입원해서 수술날짜 잡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급히 입원시켜놓고 수술 날짜까지 잡아놓고 보니 그제야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조금 늦게 발견이 되었지만 열심히 치료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하기에 하느님께 많이 기도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아직 어린 것이 죽을 때가 아니니, 살려만 주시면

지금보다도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아이도 하느님 영광을 위해

일하도록 바치겠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몸이 안 좋다고 할 때 일찍 데려만 갔어도 되었을

것을...... 먹고 사는데 급급하다 보니 딸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몰랐던 내 죄가 더 크지요.

 

다행히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았는데 1차 항암치료 때까지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습니다. 딸아이는 정말 인내심도 강하고 참을성이

많은 아이에요. 빨리 나아서 건강을 찾아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는 그 힘든 항암 치료 과정을 짜증 한번 안 내고 힘들고

아프다는 내색도 안 하고 잘 견뎌주었으니까요. “

 

항암치료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 요양을 할 때에는 동생들에게 간식도

많이 해주었어요. 동생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전에 해주던

라뽁기나 떡볶이 같은 간식을 잘 해 먹이고는 했어요.

 

공부를 가르쳐도 전 같으면 화를 많이 냈을 텐데, 투병 이후로는 화를

내지 않고 가르치더라고요.

아이들이 잘 못 알아들어도 끝까지 몇 번이고 가르쳤으니까 어쩌면

아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