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안식/호스피스 일기

호스피스 일기 (5) - 육종암에 걸린 19살 소녀 이야기 (2)

주님의 착한 종 2007. 9. 4. 07:34

조금씩 안정을 찾아갈 무렵, 추석을 이틀 앞둔 날의 일입니다.

"신부님 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살고 싶어요. 부모님께 속만 썩여

드리고 효도도 한번 제대로 못 했는데, 게다가 부모님보다 먼저 죽으니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잖아요."

 

"그래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사실이란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해볼까? 조금이라도 덜 속상하게 뭔가 의미 있는 마지막 선물을

준비하는 거야. 선물에 네 마음을 담아서 드리면 부모님이 평생

그 마음을 간직할 수 있고, 네 마음이 부모님 마음 안에 살아 있게

되니까 덜 속상하시겠지? 어떠니?"

 

"좋아요. 그런데 제가 이런 상황에서 뭘 할 수 있겠어요. 저는 가진

돈도 없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라. 너 아르바이트 해본 적 있다고 했지? 네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니까 나를 위해서 5분 동안만 기도하는 거야. 그럼 내가

1분에 만원씩 쳐 줄께"   

"그래도 되겠어요?"

"그럼! 시간은 내일까지다. 추석이 내일 모레니까 서둘러야 돼!"

 

이 아이는 부모님께 마지막 선물을 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심한 기침을

하면서도 다음날 아침까지 5분 동안 기도를 바쳤습니다.

약속대로 5만 원을 주었고 아이는 저녁 무렵 엄마 아빠의 등에 업혀

봉고차를 얻어 타고는 마지막 선물을 준비하러 나갔습니다.

 

저녁 늦게 도착한 부모와 아이는 싱글벙글 좋아하면서 예쁜 생활한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장면 냄새도 나는 것이 중국집에 가서 맛있게 외식을 하고 온

모양입니다. 아이가 잠이 든 후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에게 옷을

사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저녁 무렵에 딸 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이라며 엄마 아빠에게

마지막 효도 선물을 하고 싶으니 같이 나가자고 했습니다.

상황을 알아차린 부부는 아이와 함께 차를 끌고 나갔습니다.

 

이왕이면 평생을 간직하며 아이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했으나

5만 원 가지고는 살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길거리에서 생활한복을 파는 곳을 발견했는데

저거다 싶어 아저씨에게 가서 값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벌에 5만 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진 돈이 없으니 5만 원에 두 벌을 주면 안 되느냐고 사정을

해보았지만 손해를 보고 줄 수는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이 광경을 딸 아이가 차에서 보고 있었나 봅니다.

기다시피 혼자 차에서 내려와 아저씨에게 웃옷을 벗어 암 덩어리를

보여주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저씨 저는 19살인데 육종암에 걸려서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죽는대요.

이 돈 5만 원은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인데 죽기 전에 부모님께

마지막 효도 선물을 하고 싶은데 아저씨가 저를 불쌍하게 생각해서라도

좀 도와주세요."

 

잦은 기침과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말을 이어가는 아이를 바라보던

아저씨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습니다.

피딱지가 달라붙은 암 덩어리에, 연신 진물이 흘러내리는 오른쪽 어깨를

바라보는 아저씨도 기가 막혔는지

 

"나도 너만한 딸이 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니.

그래 너를 봐서라도 5만 원에 두 벌을 줄께.

부모님께 좋은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용기를 내거라."

하며 선뜻 두 벌을 주었습니다.

말을 마친 아이 엄마는 이런 결심을 들려주었습니다.

 

"신부님! 저는 이 옷을 추석 때만 꺼내 입을 겁니다.

아주 오래도록 입어야 하니까요. 아껴두었다가 추석 때만 꺼내 입으며

아이를 기억할 겁니다." 

눈물을 흘리며 옷을 개는 엄마는 혹시라도 옷에 때가 묻을까 봐

조심스럽게 손을 놀리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마지막 효도 선물이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며칠 후 점점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통증이 점점 심해졌고 잠시도 제대로 눕지를 못했습니다.

가슴에서 불이 나는지 답답하다고 쌀쌀한 날씨임에도 자꾸 창문을

열어달라고 했습니다. 

 

오른쪽 어깨 위 암 덩어리가 두 됫박만하게 커졌을 때

목 이곳 저곳에도 달걀만한 혹()이 생겼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암이 퍼지는 속도도 빨랐습니다.

팔이 저리고 아파 견딜 수 없을 때마다 엄마가 아이의 팔을 주물러

주었는데, 엄마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 딸 아이가 엄마를 보며 말했습니다.

 

"엄마 울지마. 어차피 사람은 한번은 죽는 거잖아......엄마가 울면.......

내가 더 힘들어......이 다음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면 되잖아......

그러니 울지마.

그리고...... 신부님께...... 너무 미안해하지 마 ......며칠만 있으면 돼......"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경우 환자들은 곧잘 자신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내뱉듯 말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비슷하게 들어맞았습니다.

 

과연 3일 후 급속도로 상태가 안 좋아지면서 임종이 시작되었습니다.

"엄마......사랑해! 아빠도!  모두 고마웠어요."

아직 맑은 정신이 남아 있을 때 힘을 다해 작별인사를 고했습니다.

한 시간 후   혼수상태가 되면서 천천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헐떡이던 입술은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듯 편안한 모습입니다.

죽을 때 힘들까 봐 무섭다던, 그래서 편안한 임종이 되기를 기도했던

바램이 이루어졌는지 정말로 잠을 자듯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아마도 낮게 오열하는 엄마, 아빠를 뒤로하고,

천국에서 만날 날을 약속하며 천사가 되어 하느님의 품으로

달려 갔을 겁니다.    <>

 

<청주교구에 계시는 박창환 신부님의 호스피스 일기를 

계속하여 올려드립니다.

연재를 해 주시는 분은 가톨릭 인터넷의 박영효 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