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중국에 온지 정확히 만 6주년이 되는 날.
추억이 될만한 글을 써보려한다.
2001년 8/31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여름방학은 맞은 나는 부모님과 멋도 모르고 중국땅을 밟았다.
내 나이 13세... 어렸고 호기심많고.. 그럴나이였다.
처음 내눈이 비친 중국은 정말 흥미로웠다.
내가 온곳은 중국의 어느 중소도시. 있을건 있고 없을건 없는... 그런 어설픈 도시였다.
정말 타임머신을 타고 십년 정도는 거꾸로 날아온듯한 이곳. 나에게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후졌지만 난 그것마져도 재미있었고, 한참 한국에서 즐겨보던 안개비 연가라는 중국드라마에 나오는 나무에, 개천에, 공원에... 난 정말 좋다라는 생각만 했었다.
앞으로 벌어질 불행한 날들을 난 모른채...
마냥 즐거웟다.
그렇게 몇주가 지났다. 부모님은 온 재산을 다 투자해서 중국에서 식당을 차리셨다.
정말 우리가족의 희망을 다 건 귀한 식당이였다.
하지만 나의 불행했던 일들은 모두다 이 식당에서 비롯된 것들이였다.
식당을 오픈하기전 조선족 종업원들이 말썽을 부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애써애써 그들을 달래가며 어렵게 식당오픈을 했다.
개업을 한날밤, 가게 문을 닫으려는 늦은시간에 이상한 사람들이 부모님의 가게에 들이 닥쳤다.
지제들은 우리를 보호해 주러 왔단다.
우리를 보호해주는 대신 보호비를 달랜다.
그래서 보호 해줄필요가 없다고 했더니 그럼 자기들은
우리식당이 더이상 영업을 하게 놔둘수 없단다.
일명 '삥' 뜯으러온 양아치들이였다.
부모님은 황당해 하셨다.
그리고 재중 한국 자영업자 협회에가서 물었다.
이런경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 양아치들의 보복이 두려워 다 돈을 내준다고 한다.
원칙주의자이신 아빠는 그것을 용납할수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돈까지 챙겨줄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
결국아빠는 그들에게 굴하지 않았고 우려했던 대로
그들은 해만지면 가게로 찾아와서 난동을 부렸다.
손님을 다 쫒아내고, 유리란 유리는 다 때려 부수고..
테이블과 의자도 다 발로차서 부셔버렸다.
아빠는 더 화가 나셨다.
엄마는 두러워서 숨어서 흐느끼신다..
나는 이런 공포를 처음 느껴봤다..
드라마 영화에서만 나올법한 폭력들이 내눈앞에서 그리고 내집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빠의 목숨까지 협박했다.
길 걸을때 조심하라는둥, 술취에서 길걷지 말라는둥...
아빠는 점점 걱정만 쌓여가셨다.
그러던 중 가게의 수입은 또 아주 낮았다..
이젠 더이상 주고싶어도 줄수가 없는 상황이였다.
그들은 심지어 내목숨을 협박하기도 했다.
아빠에게 딸래미 등하교길 조심시키라고...
난 학교에서 한국 학생을 한명 알게되었다
나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같은 한국사람이여서 첨엔 정말 반가웠다.
하지만 점점 이애는 무엇인가 모르는 질투를 나에게서 느꼇는지.... 나에게 태도가 변하더니 졸지엔 날 왕따를 시켜버렸다.
이애는 중국학교에서 자나가던 애였다.
아주 많은 동급생들이 이애를 따랐고, 이애의 눈치를 보았다.
난 성격상 친구를 많이 사귀는 편이지만 내가 중국애한테 말을 걸면 애들은 항상 그 한국애의 눈치를 보았다.
난 학교에서 친구가 한명도 없었다.
하지만 아빤 깡패들이 나에게 무슨짓을 할지모르니 항상 친구랑 같이 집에 오란다...
난 아빠에게 학교에서 친구가 없어요라고 말할수 없었다.
아빤 내가 아니더라도 걱정거리가 너무나도 많으셨다.
난 외로웠고, 무서웠고, 두러웠고, 슬프고, 아팠다.
최악의 상황에서 점점 지쳐가던 부모님께서는 언성을 높이시는날들이 잦아졌다.
아빠가 술을 마시는 날도 잦아졌고, 엄마가 우시는 날도 잦아졌다..
우리가족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난 내방에서 혼자 몰래 소리죽여 울수밖에 없었다.
난 13살밖에 되지않았었다.
내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아직도 아무 걱정거리들 없이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을텐데...
난 왜 이렇지..? 라는 생각이 날 괴롭혔고, 난 부모님이 원망스러울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거의 3개월 정도가 지났다..
결국엔 아빠가 이기셧다. 불행중 다행이 아빠의 제보로 이 강패들은 행패를 부리러 우리가게를 찾았다가 공안국에 딱 걸려서 다 잡혀간것이였다.
이렇게 난 지옥같은 생활이 끝날줄알았다.
하지만 이젠 조선족 종업원들이 또 말썽이였다
이들은 조금만 자기 맘에 안들게 하고 자기 비위안맞춰주면 그만둔단다.
이것은 분명 계약 위반이고 우리부모님은 월급을 다 지불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이번엔 또 얘네들이 양아치를 끌고 왔다.
이들은 또 아빠를 협박했고 죽여버린다고 난리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난 그들이 정말 그럴것 같아 무서워서 미칠것만 같았다.
더이상 조선족이 없으니 이젠 내가 혼자서 경찰에 신고를 해야한다.
하지만 몇개월밖에 되지않은 나는 중국어를 잘 할줄 몰랐다.
난 옆에서 몰래 사전을 꺼냈다.
그리고 '협박' '살해' 라는 단어를 중국어로 찾아냈다.
아빠 명함에 있는 가게 주소 발음을 다 사전으로 다 찾아보고 난 공안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중국말이 서툰나의 말을 공안은 들어주기 귀찮았나보다.
나는 정말 펑펑울면서 중국어 한국어 영어 다섞어가며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하늘에서 도우셨는지.. 그들은 용케도 가게를 찾아왔고
양아치들은 줄행랑을 쳤다.
그렇게 난 중국에서 '협박' '살해' '깡패'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알게되었다.
이렇게 힘들게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정말 지긋지긋할정도로 힘들었다.
2년후 부모님은 도저히 그 가게를 더이상 운영할수없었다.
아주 헐값에 가게를 팔아버리고나서는 더이상 우리가족에게 수입은 없었다.
고민 끝에 어쩔수 없이 엄마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나와 아빠만 중국에 남았다.
그때 내나이 중2때 였다.
아빤 하루종일 집에만 계셨고 아빠의 스트레스는 나날히 더해져만 갔다.
그 스트레스들은 자연스럽게 나한테 풀여졌고 난 그런 아빠가 밉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난 아무런 말도 할수없었고 , 아무런 반항도 할수없었다.
난 아빠의 속상함과 힘든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주 눈꼽만큼이라도 이해해 드리고 싶었다.
공부밖에 할수있는게 없었다.
공부만이 내가 집안일을 잊을수 있게했고
공부를 잘해야만 아빠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드릴수 있을것 같았다.
중학교 3년동안은 정말 공부만 했던것 같다.
난 아빠의 오아시스가 되어드리고 싶었던것 같다.
난 정말 중국사람처럼 하고 살았다.
머리도 중국사람이 하는 제일 싼 이발소에가서 중국애들이 하는 커트 머리를 쳤고,
학교교복은 촌스러워도 맨날맨날 입고 다녔다.
완전 누가 봐도 중국애처럼 변했다.
그랬더니 중국친구가 정말 많이 생겼다 중학교에선...
그리고 난 선생님들도 언제나 칭찬을 해주셨다.
난 선생님의 칭찬듣는것이 유일한 낙이였었다.
내 주위애도 정말 많은 한국 학생들이 있다.
우리학교에만해도 20명은 족히 넘었으니...
하지만 그들은 나와 너무나도 달랐다.
공주 왕자같은 씀씀이와.
너무나도 세련된 옷차림.
그리고 악세서리들...
그런애들과 비교했을때 난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중국애들은 항상 물었다." 너 진짜 한국사람 맞어?
너만 왜 그러고 다녀?"
한국애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좋은 조건에서 생활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언제나 불평불만만 늘어놓았고 그것의 그들의 일상이였다
"야! 저 짱깨봐 진짜 촌스러" " 야, 쟤봐, 진짜 드러워" " 야, 쟤봐, 옷이 왜저래? 어우 저 찌질이들"
선생님들꼐 대놓고 한국말로 욕설을 퍼붓는건 기본이였다.
그들은 나에게도 그랬다." 야, 내 짝꿍말로는 쟤가 한국애래 ㅎㅎㅎ 완전 어디서 저런 찌질이가 왓냐??ㅎㅎㅎ "
"지가 범생인줄아나봐 아놔, xx 재섭어!"
내가 지나가면 그들은 항상 이렇게 아무이유없이 날 욕해댔다.
난 물론 슬펐고 그들이 미웠다. 한때는 한국인 기피증까지 있었다.
심지어 한번은 중국애가 이렇게 물었다." 야, 너 진짜 이상하다. 왜 다른 한국애들은 저렇게 이쁘게 하고 다니는데 너만 이러고 다녀? 너 혹시 북한사람이냐?'
난 웃으며 대답했다" 너 죽을래? 이렇게 살 많이 붙은 북한사람 봤어? 나 진짜 한국사람 맞거든? 그냥 안꾸민것 뿐이야..ㅎㅎ 한번만 더 그런소리 해봐라 다 죽는다!ㅎㅎㅎ"
난 호탕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난 집에가서 잠을 못잤다. 울었다.
너무 속이 상했다
나더러 북한 사람이라고 해서 속이상한게 아니라,
아무도 내가 왜 이러고 다녀야 하는지 이해를 못해줬다.
아무도 내 사정을 몰랐다.
나도 이뻐지고 싶은 사춘기 소녀였다.
나도 한국애들이 입고 다니는 이쁜옷 입어 보고 싶었고, 나도 그런 머리 해보고 싶었고, 나도 그런 이쁜 악세서리 달고 다니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난 그럴수 없다.
그런것이 나도 부러웠지만 애써 내 자신을 위로했다.
' 아니야... 난 정상이야.. 난 나중에 훨씬 그애들보다 잘될꺼구,,, 꼭 그애들보다 행복해 질꺼야.. 내가 마지막에 웃는 그 사람이 될꺼야..'
그렇게 중학교 3년을 보냈다.
정말 운이 좋게도 난 내 실력으로 시험을 치르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할수있었다.
중국에선 중학교 한반 인원수가 70명이 다 넘는다.
하지만 이중 30명 정도만 인문계에 간다.
경쟁은 언제나 치열했다. 하지만 난 이겨냈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기뻣다.
남들이 보기엔 무슨 명문대 붇은 것도 아니고, 인문계 고등학교 붙었다고 저 오버냐.. 할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고등학교의 합격은 다른 의미가 있었다.
여기선 외국인이 시험을 치르지 않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을 할려면 한화 200만원 정도가 든다.
난 내가 힘드신 부모님께 그런 경제적 부담을 덜어드렸다는것이 너무나도 날아갈듯이 행복했다.
그리고 집에가서 아빠한테 말씀 드렸더니, 아빤 내 어깨를 치면서 ' 수고했다' 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한마디지만 난 아빠의 그 눈을 잊지 못한다.
아빤 분명 날 너무나도 대견스러워하시고 계셨다.
난 내가 늘 그늘만 져있던 아빠의 어두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게 할수있다는것 이 너무나도 기뻣다.
그렇게 나의 중국생활 4년이 지나갔다.
그후로 나는 예정대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너무나도 행운인게, 아빠가 중국에 있는 한국회사에 취칙을 하셨다.
비록 그리 좋은 보수는 아니지만, 비록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직업은 아니지만, 난 너무나도 감사한다.
그리고 중국생활을 시작한지 만 6년이 된 오늘 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우리가족은 어렵고 힘든일이 많다.
하지만 난 더이상 힘들지 않다.
더이상 불행하지 않다.
난 아직도 중국사람처럼 산다.
물론 그때 보단 생활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나의 한국친구들은 내가 중국사람같다고 놀리고 농담도 한다.
하지만 난 이제 행복하다.
더이상 외롭지 않아서...
중국친구든 한국친구든 친구들이 있어서...
더이상 이상한 세계의 사람들이 우리가족을 협박하지 않아서...
그래서 난 행복하다.
지난 6년 간 아주 힘들고 슬픈일이 많았던 나날들...
난 더이상 미워하지 않을꺼다.
난 그 세월들을 감사하고 또 아낄꺼다.
중국이란 미계한 나라에서..
중국이란 미묘한 나라에서..
중국이란 살벌한 나라에서..
난 인생이란것을 배웠고, 난 더이상 철없는 꼬마애가 아니게 되었다.
지난 6년간. 내가 뼈절이게 그 진실성을 체험했던 한마디가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한마디.
" 추위에 떨어본 자만이 햇살의 따스함을 감사할줄 안다."
그렇다. 난 너무 추웠고 지금은 따뜻하다.
그래서 하늘에게 감사하고 내사전에 불평불만이란 더이상 없다.
바로 중국이란 나라에서...
난 이 소중한 것을 깨닳은 것이다.
중국. 나의 청소년기를 다 보낸곳이다.
19세인 지금.
난 이렇게 날 힘들고 아프게 했던 중국을...
이 미운 중국을 더이상 미워할수없다...
지금도 수많은 한국유학생들은 중국에서 이게 안좋고 저게 안좋고 하면 이곳에서 글을 남긴다.
나도 동감하는 말이 많다.
하지만, 좀더 넓게 바라 보는 그런 학생들이 늘어났음 좋겠고 그들도 나중에 중국생활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나같은 생각을 하게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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