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일 화요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마태오 23,23-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
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 그러므로 이제 내가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율법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면 너희는
그들을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고 또 이 고을 저 고을 쫓아다니며 박해할 것이다.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베레
크야의 아들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쏟아진 무죄한 피의 값이
모두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이 세대에 닥칠 것이다.”
(마태 23,23-36)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삶의 최저점에서>
세상살이의 허무함을 두루 경험했던 성인(聖人), 삶의 최저점까지 내려가
보았던 성인, 죄의 실체가 무엇인지 또렷이 체험했던 성인,
그래서 방황하는 양떼들을 ‘제대로’ 이끌 수 있었던 겸손했던 지도자
아우구스티노 주교학자 기념일을 맞아 복음은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쇄신되지 않은 신앙관, 언행의 불일치, 교만 등의 원인으로 참된 지도자
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숙제 한 가지를 주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리사이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참된 지도자상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의 묵상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우구스티노는 후배 수도자들을 위한 삶의 지침으로 ‘수도규칙’을
썼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수도규칙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들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규칙을 여러분들에게 선물로 드립니다만, 규칙 속에 묶여서 노예처럼
살지 말고 은총으로 자유롭게 살아가십시오.”
아우구스티노는 아무런 갈등 없는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공동체와 관련된 그의 사상 안에는 반
유토피아(Anti-Utopia)에 대한 생각이 깃들어있음이 확실했습니다.
그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힘에 겨운 규칙의 이행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수도원이
광신도들의 모임과 같은 성격을 지녀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도자들끼리 형제애를 실천함에 있어서 환상을 지니지 말 것을 또한
권고합니다. 수도원도 엄연히 또 하나의 세상이라는 것을 아우구스티노는
잘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수도자들이 능력도 안 되면서 지나치게 아름다운 삶을 연출하려는 데만
몰두하다 보면 어색하거나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동료 수도자들에게 일주일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라고 권고했는데, 그 거울은 다름 아닌 ‘규칙서’였습니다.
정기적으로 규칙서를 들여다보면서 자신 안에 왜곡된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지속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위대한 대(大) 성인 아우구스티노의 파란만장하고 굴곡 많았던 신앙
여정을 묵상하면서 ‘바닥 체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약한 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가장
밑바닥, 아우구스티노는 그 가장 밑바닥에서 주님을 절실하게 만났고,
거기서 주님과의 영적 인생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세상 것들의 부질없음을 절절히 맛보았던 아우구스티노였기에, 가장 큰
아름다움이신 주님을 절실히 만났던 그였기에 이런 고백이 가능했습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님을 찾았습니다.”
“나 홀로 될 때 타락한 생활을 했사오나
당신 안에서 새 생명을 찾아냈나이다.”
다음은 아우구스티노가 결정적 삶의 전환이 가능했던 배경이 된 기도입니다.
“나는 멀리 떨어져 방황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당신을 기억했나이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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