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오 하느님

성모님과 그 할머니

주님의 착한 종 2007. 3. 13. 13:11
  

지금부터 약 15년 전쯤 된 어느 겨울

"어머니께서 내일 운명하실 것 같으니 오전에 오셔서 종부성사 좀 주세요."

라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내일 운명하실지 어떻게 아세요?" 라고 물었더니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하는 며느리의 대답에 반신반의하면서

나는 다음날 성사를 주러갔습니다.

 

제법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마을 입구(지금의 분당시 야탑동 근처) 까지

한복에 흰 고무신을 신고 은비녀를 꽂고 곱게 단장한 어느 할머니가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당시엔 제법 기억력이 좋아 대부분의 교우들을 기억했는데, 못 보던 분이라

"할머니는 누구세요?" 라고 물었더니 오늘 종부성사를 받을 할머니라고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어제 전화도 그렇고, 이렇게 마을 입구까지 직접 마중 나온 분이 종부성사를

받을 분이라니, 그리고 오늘 돌아가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연세가 드시면 이런 식으로도 망령이 드시는 건가? 외모는 참 깔끔하신데...

 

분명히 종부성사를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되었지만,

노인네 건강은 겨울날씨 같다는 생각이 들고,

노환도 병은 병이라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춥다며 젊은 본당신부에게 아랫목을 권하고 할머니는 따뜻한 곳을 비켜서

다소곳이 옆에 앉으셨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덕이 있어 보이셨습니다.

함께 갔던 본당 신자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가,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얘야, 신발 가져오너라." 고 하자 안방에서

"어머니, 그리로 신발을 가져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신발을 가져오라는 말에 내가 "할머니, 신발은 왜요?" 라고 물으니

"어머니께서 가시자고 합니다."

 

할머니가 어머니라고 하시는 분은 누구를 말하는가? 이상하기도 하지만

문득 할머니가 환상을 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할머니, 거긴 신발 신고 가는 곳이 아녀요." 라고 했더니

"그래요? 얘야, 그럼 그만 둬라." 하고 말씀하셨다.

내가 할머니께 성모님을 보고 계시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왜 성모님께 인사도 안 드리시냐고 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성모님이 어디 계시냐고 했더니 지금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나는 성모님을 볼 수도 없었고 할머니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성당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서자 할머니도 따라 일어서시며

마지막(?) 하직 인사를 하셨는데, 슬프게도 뭐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이 안 납니다.

아마 잘 살다 오시라는 말씀 같았습니다.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잘 가요. 신부님."

 

방문을 열고 마루를 내려와 안마당을 반쯤은 밟았을까...

"신부님!" 하고 부르는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며느리의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방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는데,

아! 나에게 잘 가라고 작별 인사를 하신 지 불과 2분 사이에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가셨던 것입니다.

아까 그 자리에 이미 숨이 끊어져 곱게 누워 계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기억납니다.

 

그 할머니는 교적도 없었고,

며느리라는 자매도 그분이 정작 누군지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석 달 전에 시장에서 처음 만나 자기에게 신세를 지고 싶다고 하기에,

자기도 교우이고, 할머니가 괜찮아 보여 어머니로 모시며 돌보아 드릴 겸

집으로 모시고 왔는데,

석달 동안 할머니의 덕에 완전히 압도되어 그 자매는 할머니께 순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신상에 대해서는 자기에게도 자세히 알려 주지 않아

그 자매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놀랍기만 하다고 했습니다.

 

그 할머니,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서 어떻게 사셨는가?

정체도 알 수 없이 내게 놀랄 체험만 안겨주시고 가셨는데,

5월 성모 성월을 보내면서 그 할머니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때 성모님께 축복으로 내 머리에 손을 얹어 달라고 청할 수만 있었다면...

그리고 정말로 성모님은 이렇게 믿는 자를 직접 데려가신다는 것을 볼 수 가

있었습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모님께 의탁하는 자 지옥에 빠질 수 없다." 하셨는데,

나 역시 이 체험을 통하여 성모님께 대한 남다른 신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

 

- 금곡동 본당 주임 최충열(마태오) 신부 -

'하늘을 향한 마음 > 오 하느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에 보내는 여덟 가지의 기도  (0) 2007.03.14
열어 주소서.  (0) 2007.03.13
성체의 성모님  (0) 2007.03.13
미사의 값  (0) 2007.03.13
오늘이 가기 전에  (0) 2007.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