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爲邦 사장은 대만에서 화공 박사학위를 받고 20 년간 FRP 공장을 운영했던 기업인이다. 그는 河北성 石家庄에 있는 中意공사의 상품을 사서 미국 바이어에게 팔았는데 이 거래에서 외모가 단정하고 겸손한 중국 청년 曾念慶을 여러 차례 만나게 되었다.
曾은 대학을 졸업한지 2년 된 젊은이로 高사장을 만날 때마다 현재 자기 뜻을 펴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만일 高사장을 위해 일할 기회가 생긴다면 몸을 던져 충성을 바치겠으니 중국에 투자해서 FRP 공장을 세우라고 권고하였다.
高사장은 曾이 FRP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 믿음이 갔다. 그리고 대만에서는 FRP 산업이 이미 직공조차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기계 설비를 중국으로 이전해 와, 젊은 曾에게 기술을 전수시키고 경영관리 방법을 훈련시키면 상품의 경쟁력도 높이고 후진도 양성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1997년 말 河北성 廊坊시 燕郊개발구에 소위 유리강철이라고 불리는 강화유리섬유플라스틱 공장을 단독투자로 설립했다. 공장의 위치는 北京 천안문에서 동쪽으로 약 30 km 떨어진 곳이었다. 공장 완공 후 4개월만에 각종 고강도 FRP 격자판과 예술품 화분을 만들어 첫 컨테이너를 뉴욕으로 실어 보냈고 바이어로부터 품질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高사장은 曾이 열심히 일하고 헌신적인 태도를 보여 曾을 부총경리로 임명하고 대부분 관리 업무를 曾에게 맡겨 처리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曾이 수시로 거짓 보고를 하고 각종 비용을 통상적인 수준보다 몇 배나 부풀려서 청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舊 공장의 지붕을 일부 수리하는 간단한 공사인데도 전체 지붕을 새로 교체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
高사장도 처음에는 曾이 영수증을 속여고 돈을 마구 쓰는 것을 사소한 결점 정도로 너그럽게 보아 넘겼는데 결국에는 그 것이 무서운 악몽의 시작이었다는 것, 그리고 曾의 본색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曾은 원래 石家庄의 한 유리강철 공장인 中意 회사에서 高사장과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 미국 바이어에게 수출했는데 1년에 겨우 6개 컨테이너밖에 팔지 못했고 그나마 품질 불량으로 절반을 반품당해 거래금지 리스트에 오르는 위기에 몰려 있었다.
曾은 미국 바이어를 놓치게 될 위기에 직면하자 의도적으로 高사장에게 접근하여 중국에 투자하도록 유혹한 것이었다. 그리고 高사장의 공장에서 똑같은 제품을 만들며 기술을 배웠다. 기술부족 문제가 해결되자 곧바로 회사를 빼앗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이었다.
曾은 高사장이 그를 채용하기 전에는 매우 가난한 청년에 불과했다. 高사장은 曾을 채용해서 핸드폰, 노트북 컴퓨터, 심지어 승용차까지 사주고 부총경리라는 직위와 권한을 주었는데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항상 말썽을 일으켰고 高사장의 지시를 고의로 듣지 않았다.
그리고 高사장에게 "대만의 관리방식은 중국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하며 차라리 자기가 혼자 경영할 테니 공장을 자기에게 팔라고 요구했다.
高사장은 나이 어린 曾이 돈이 없으니까 이전에 일했던 石家庄의 공장으로부터 돈을 빌릴 것으로 짐작하고 "네가 무슨 돈으로 나의 공장을 사려하느냐 ? " 라고 물었다. 그러나 曾은 뜻밖에 "高사장이 돈을 빌려 주면 빌린 돈으로 공장을 산 다음에 나중에 천천히 돈을 벌어서 갚겠다. "라고 대답했다.
高사장은 "만일 네가 실패하면 돈을 어떻게 갚을 것이냐 "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高사장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마 내가 간섭을 많이 하니까 간섭에 반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달랬다.
그러나 曾은 이런 방식이 高사장에게 먹혀들지 않자 수단을 바꾸었다. 高사장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이사회 기록과 수권서를 위조로 작성했다. 그리고 은행과 결탁해서 인민폐 120 만元을 빌리고, 그 돈을 회사 구좌로 입금시킨 다음, 은행이 그에게 만들어준 카드를 이용해서 회사의 회계원과 출납원도 모르게 그 돈을 자기 구좌로 빼 돌렸다.
그리고 北京시 順義구에 자기 공장을 차리고 똑같은 제품을 생산했다. 高사장은 이 사실을 한달이 훨씬 지난 다음에야 알았다. 당시에 曾은 항상 회사에서 부득이하게 급한 돈이 필요하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北京에 자기 공장을 차린 것을 알고서야 비로서 사태가 심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高사장은 曾에게 새로 짓고 있는 新공장 건설을 중지시키고 앞으로는 사장의 동의없이 어떠한 문서에도 사인하지 못하도록 못 박았다. 그리고 자금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이 하나도 쓸모없는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왜냐하면 曾이 자기 지시를 어기고 舊공장을 건설했던 업자에게 新공장의 건설을 계속 맡기고 깜짝 놀랄 정도로 신속하게 완공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曾은 또 회사의 법률 고문과 짜고 회사 은행구좌 책임자의 인감을 자기 인감으로 바꾸고 임의로 회사 돈을 꺼내 갔다.
新공장이 완공되기 직전, 曾은 또 이사회 기록과 수권서를 위조해서 新공장 건물을 담보로 은행돈을 빌렸다. 은행은 新공장이 아직 토지사용권 증명서를 확보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공장건물 가격을 높게 평가해서 2주일도 안되는 짧은 기간 내에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 高사장은 曾이 자기의 지시를 어기고 공장을 빨리 지어 버린 것이 은행 융자를 받기 위한 술책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曾은 은행 융자를 받자마자 별도로 자기 공장을 지어 高사장의 공장과 똑같은 제품을 생산하였다. 그리고 원료를 구매한다는 거짓구실로 회사 돈을 끌어내 자기 공장의 제품을 사들였다. 그리고 창고 관리자, 회계 책임자에게 가짜 전표를 제출해서 회사 돈을 빼 내가는 행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위장하였다.
한 달 가량의 구정 연휴가 시작되자 高사장은 쉬는 기간을 이용하여 회사 장부도 정리하고 관리담당 직원들도 교체한 다음 새해부터 다시 새롭게 출발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구정 연휴 동안 회사 재물과 공장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燕郊개발구 관리위원회에1999.2.8 - 3.1 기간 중에 경위 3명을 제외하고는 공장 화물과 인원들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대만으로 휴가를 떠났다.
그러나 曾은 2.21 石家庄 中意공사의 총경리 岳紅軍, 冀州 법원의 법관, 서기(冀州 법원은 이 사실을 부인했음), 그리고 中意공사 직원 40 여명을 데리고 공장에 강제로 진입했다. 법적 집행문서도 없이 전화선을 끊어 버리고 10대의 대형 트럭과 6대의 소형 트럭을 가지고 와서 회사가 수출 하려는 4개 컨테이너 분량의 완제품과 컴퓨터, 회계장부, 그리고 뜯어갈 수 있는 모든 생산 설비를 中意 공장으로 실어가 주차장에 쌓아 두었다.
그 다음날 冀州 법원은 재산보전 판정을 내리고 中意공장 지하 주차장에 쌓아둔 물건들에게 査封 딱지를 붙였다. 법원은 제 3자의 재산을 査封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高사장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4개월 뒤에 보전 판정을 철회했다.
그러나 査封되었던 완제품들은 모두 중의공사가 해외로 팔아먹었고, 나머지 생산설비, 사무용품 등의 고가 설비들은 모두 中意 공사가 버리는 쓰레기들로 바뀌어져 있었다.
高사장은 은행을 찾아가 어떻게 자기도 모르게 직원이 돈을 빼갔는지 알아보기 위해 대부 책임자에게 대부신청서와 대부계약서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은행 측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高사장이 자기가 회사 대표인데 대부 계약서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 부당하다고 따지자 그때서야 계약서를 보여주었다.
계약서상에는 高사장의 사인과 다른 대만측 이사 한사람의 사인이 모두 위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은행 책임자는 오히려 큰소리로 高사장을 야단쳤다. "은행이 이사회 기록과 수권서 상의 사인이 모두 위조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 " 라고 호통을 쳤다.
高사장은 "서류를 조사하지 않은 것은 은행의 업무 소흘이다. 은행이 曾에게 속았고 빌린 돈은 우리 회사와 무관하므로 갚을 수 없다. " 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은행은 高사장을 법원에 고소했다. 여자 법관과 서기관이 공장을 찾아와 정문을 봉쇄하고 창고 문 앞에 査封 딱지를 붙였다. 공장 가동을 중단시켜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高사장이 화가 나서 여자 법관과 심하게 말다툼을 벌이자 여자 법관은 다시 법원장을 데리고 왔다. 高사장은 법원장에게 "대부 계약서상 회사 대표의 서명이 위조되었기 때문에 이 대부 계약서는 무효이다. 그리고 은행도 曾에게 속았기 때문에 은행은 曾에게 배상을 요구해야 하며 나는 이 돈을 갚을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법원장이 물었다. "회사 도장이 위조된 것인가 ? " "회사 도장은 매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조된 것이 아니다." 그러자 법원장은 자신 만만하게 말했다. "우리는 회사 도장만 인정한다. 회사 도장이 가짜가 아니라면 서명의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이 계약서는 유효하다."
법원장은 계속 물었다. " 인민폐 120 만元이 당신 회사의 은행 구좌로 입금되지 않았느냐 ? " 고사장은 "당연히 그렇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법원장은 " 그렇다면 은행은 책임이 없다. 돈이 당신 회사의 부총경리 개인 구좌로 빠져 나간 것은 당신 회사의 관리불량 책임이다." 라고 더욱 큰소리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부하 직원이 은행과 짜고 회사 명의로 돈을 빌려간 다음 그 부채를 대만회사 사장에게 뒤집어씌우는 사례는 아주 많이 발생한다. 화가 난 高사장이 현지 인사에게 "법원장이 어느 대학의 법학과를 졸업 했느냐." 라고 묻자 현지 인사는 "법관하는데 무슨 대학졸업이 필요한가? 공산당원으로 약간의 관계만 좋으면 단기간 훈련받고 임명이 가능하다.
심판해 가면서 배우면 되지. 어떻게 판결하냐고? 그런 것은 領道한데 물어보면 돼!" 라고 냉소했다.
高사장은 이 사건을 다시 현지 공안부서에 신고하였으나 공안은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全國人大(입법기관, 국회와 유사)의 모 인사가 적극적으로 관여해서 로비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관련 기관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질질 끌다가 흐지브지 끝내 버리고 말았다.
高사장이 아무리 증거를 제시해도 河北성 전체 상하 모든 기관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 사건을 경제 분규로 취급해서 형사 안건으로 처리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모 유력 인사의 도움을 청하자 대만판공실의 전 주임이었던 楊斯德이 대만 판공실의 국장, 처장들을 데리고 三河시에 내려와 사건의 전말을 청취하고 돌아갔다.
三河시 시장은 9월 21일 회의 중 공안국에 曾, 岳 두 사람을 체포해서 사건을 종료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1 개월이 지나도 공안국은 그들을 체포하지 않았다. 오히려 "中意공사 직원들이 수백명인데 우리 형사들 겨우 4명에 불과하다. 무리하게 공장에 진입했다가 잡히거나 실종 또는 살해되면 우리가 어떻게 그들의 가족들을 대할 면목이 있겠는가? " 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曾, 岳 두 사람을 체포하지 않으면 사건이 종료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잡히기는커녕 여러 가지 수단으로 高사장의 회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고사장은 더 이상 회사를 경영해 나갈 수 없었고 계속적인 압박을 받아 끝내2000.1.20 문을 닫고 말았다.
高사장은 다시 대만의 국회의원, 중국의 대만 판공실 등 유력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河北성 政法委가 신속하게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도 전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은 조사 결과가 高사장의 주장과 다르고 또 은행과 당사자들이 명확한 서면자료를 제출하지 않아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高사장을 더욱 분노케 하는 것은 高사장의 법률고문이었던 張夢祥 변호사가 高사장의 이름을 이용해서 현지 신문에 燕郊개발구의 투자 환경이 우수해서 투자 후 1년 만에 전 투자금액을 회수하였다는 글을 게재하여 대만 기업들을 계속 속여서 끌어 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느 대만 업체가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이 어느 누구를 망하게 만들고 싶으면 그가 중국에 가서 투자하도록 만들면 된다."高사장은 대만동포 투자보호법이 유명무실하기 때문에 대만 투자 업체들은 그야말로 힘없는 먹잇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자료원 ; 대만의 중국투자 피해자 협회 고위방 회장)
曾은 대학을 졸업한지 2년 된 젊은이로 高사장을 만날 때마다 현재 자기 뜻을 펴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만일 高사장을 위해 일할 기회가 생긴다면 몸을 던져 충성을 바치겠으니 중국에 투자해서 FRP 공장을 세우라고 권고하였다.
高사장은 曾이 FRP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 믿음이 갔다. 그리고 대만에서는 FRP 산업이 이미 직공조차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기계 설비를 중국으로 이전해 와, 젊은 曾에게 기술을 전수시키고 경영관리 방법을 훈련시키면 상품의 경쟁력도 높이고 후진도 양성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1997년 말 河北성 廊坊시 燕郊개발구에 소위 유리강철이라고 불리는 강화유리섬유플라스틱 공장을 단독투자로 설립했다. 공장의 위치는 北京 천안문에서 동쪽으로 약 30 km 떨어진 곳이었다. 공장 완공 후 4개월만에 각종 고강도 FRP 격자판과 예술품 화분을 만들어 첫 컨테이너를 뉴욕으로 실어 보냈고 바이어로부터 품질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高사장은 曾이 열심히 일하고 헌신적인 태도를 보여 曾을 부총경리로 임명하고 대부분 관리 업무를 曾에게 맡겨 처리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曾이 수시로 거짓 보고를 하고 각종 비용을 통상적인 수준보다 몇 배나 부풀려서 청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舊 공장의 지붕을 일부 수리하는 간단한 공사인데도 전체 지붕을 새로 교체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
高사장도 처음에는 曾이 영수증을 속여고 돈을 마구 쓰는 것을 사소한 결점 정도로 너그럽게 보아 넘겼는데 결국에는 그 것이 무서운 악몽의 시작이었다는 것, 그리고 曾의 본색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曾은 원래 石家庄의 한 유리강철 공장인 中意 회사에서 高사장과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 미국 바이어에게 수출했는데 1년에 겨우 6개 컨테이너밖에 팔지 못했고 그나마 품질 불량으로 절반을 반품당해 거래금지 리스트에 오르는 위기에 몰려 있었다.
曾은 미국 바이어를 놓치게 될 위기에 직면하자 의도적으로 高사장에게 접근하여 중국에 투자하도록 유혹한 것이었다. 그리고 高사장의 공장에서 똑같은 제품을 만들며 기술을 배웠다. 기술부족 문제가 해결되자 곧바로 회사를 빼앗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이었다.
曾은 高사장이 그를 채용하기 전에는 매우 가난한 청년에 불과했다. 高사장은 曾을 채용해서 핸드폰, 노트북 컴퓨터, 심지어 승용차까지 사주고 부총경리라는 직위와 권한을 주었는데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항상 말썽을 일으켰고 高사장의 지시를 고의로 듣지 않았다.
그리고 高사장에게 "대만의 관리방식은 중국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하며 차라리 자기가 혼자 경영할 테니 공장을 자기에게 팔라고 요구했다.
高사장은 나이 어린 曾이 돈이 없으니까 이전에 일했던 石家庄의 공장으로부터 돈을 빌릴 것으로 짐작하고 "네가 무슨 돈으로 나의 공장을 사려하느냐 ? " 라고 물었다. 그러나 曾은 뜻밖에 "高사장이 돈을 빌려 주면 빌린 돈으로 공장을 산 다음에 나중에 천천히 돈을 벌어서 갚겠다. "라고 대답했다.
高사장은 "만일 네가 실패하면 돈을 어떻게 갚을 것이냐 "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高사장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마 내가 간섭을 많이 하니까 간섭에 반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달랬다.
그러나 曾은 이런 방식이 高사장에게 먹혀들지 않자 수단을 바꾸었다. 高사장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이사회 기록과 수권서를 위조로 작성했다. 그리고 은행과 결탁해서 인민폐 120 만元을 빌리고, 그 돈을 회사 구좌로 입금시킨 다음, 은행이 그에게 만들어준 카드를 이용해서 회사의 회계원과 출납원도 모르게 그 돈을 자기 구좌로 빼 돌렸다.
그리고 北京시 順義구에 자기 공장을 차리고 똑같은 제품을 생산했다. 高사장은 이 사실을 한달이 훨씬 지난 다음에야 알았다. 당시에 曾은 항상 회사에서 부득이하게 급한 돈이 필요하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北京에 자기 공장을 차린 것을 알고서야 비로서 사태가 심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高사장은 曾에게 새로 짓고 있는 新공장 건설을 중지시키고 앞으로는 사장의 동의없이 어떠한 문서에도 사인하지 못하도록 못 박았다. 그리고 자금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이 하나도 쓸모없는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왜냐하면 曾이 자기 지시를 어기고 舊공장을 건설했던 업자에게 新공장의 건설을 계속 맡기고 깜짝 놀랄 정도로 신속하게 완공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曾은 또 회사의 법률 고문과 짜고 회사 은행구좌 책임자의 인감을 자기 인감으로 바꾸고 임의로 회사 돈을 꺼내 갔다.
新공장이 완공되기 직전, 曾은 또 이사회 기록과 수권서를 위조해서 新공장 건물을 담보로 은행돈을 빌렸다. 은행은 新공장이 아직 토지사용권 증명서를 확보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공장건물 가격을 높게 평가해서 2주일도 안되는 짧은 기간 내에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 高사장은 曾이 자기의 지시를 어기고 공장을 빨리 지어 버린 것이 은행 융자를 받기 위한 술책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曾은 은행 융자를 받자마자 별도로 자기 공장을 지어 高사장의 공장과 똑같은 제품을 생산하였다. 그리고 원료를 구매한다는 거짓구실로 회사 돈을 끌어내 자기 공장의 제품을 사들였다. 그리고 창고 관리자, 회계 책임자에게 가짜 전표를 제출해서 회사 돈을 빼 내가는 행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위장하였다.
한 달 가량의 구정 연휴가 시작되자 高사장은 쉬는 기간을 이용하여 회사 장부도 정리하고 관리담당 직원들도 교체한 다음 새해부터 다시 새롭게 출발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구정 연휴 동안 회사 재물과 공장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燕郊개발구 관리위원회에
그러나 曾은 2.21 石家庄 中意공사의 총경리 岳紅軍, 冀州 법원의 법관, 서기(冀州 법원은 이 사실을 부인했음), 그리고 中意공사 직원 40 여명을 데리고 공장에 강제로 진입했다. 법적 집행문서도 없이 전화선을 끊어 버리고 10대의 대형 트럭과 6대의 소형 트럭을 가지고 와서 회사가 수출 하려는 4개 컨테이너 분량의 완제품과 컴퓨터, 회계장부, 그리고 뜯어갈 수 있는 모든 생산 설비를 中意 공장으로 실어가 주차장에 쌓아 두었다.
그 다음날 冀州 법원은 재산보전 판정을 내리고 中意공장 지하 주차장에 쌓아둔 물건들에게 査封 딱지를 붙였다. 법원은 제 3자의 재산을 査封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高사장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4개월 뒤에 보전 판정을 철회했다.
그러나 査封되었던 완제품들은 모두 중의공사가 해외로 팔아먹었고, 나머지 생산설비, 사무용품 등의 고가 설비들은 모두 中意 공사가 버리는 쓰레기들로 바뀌어져 있었다.
高사장은 은행을 찾아가 어떻게 자기도 모르게 직원이 돈을 빼갔는지 알아보기 위해 대부 책임자에게 대부신청서와 대부계약서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은행 측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高사장이 자기가 회사 대표인데 대부 계약서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 부당하다고 따지자 그때서야 계약서를 보여주었다.
계약서상에는 高사장의 사인과 다른 대만측 이사 한사람의 사인이 모두 위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은행 책임자는 오히려 큰소리로 高사장을 야단쳤다. "은행이 이사회 기록과 수권서 상의 사인이 모두 위조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 " 라고 호통을 쳤다.
高사장은 "서류를 조사하지 않은 것은 은행의 업무 소흘이다. 은행이 曾에게 속았고 빌린 돈은 우리 회사와 무관하므로 갚을 수 없다. " 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은행은 高사장을 법원에 고소했다. 여자 법관과 서기관이 공장을 찾아와 정문을 봉쇄하고 창고 문 앞에 査封 딱지를 붙였다. 공장 가동을 중단시켜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高사장이 화가 나서 여자 법관과 심하게 말다툼을 벌이자 여자 법관은 다시 법원장을 데리고 왔다. 高사장은 법원장에게 "대부 계약서상 회사 대표의 서명이 위조되었기 때문에 이 대부 계약서는 무효이다. 그리고 은행도 曾에게 속았기 때문에 은행은 曾에게 배상을 요구해야 하며 나는 이 돈을 갚을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법원장이 물었다. "회사 도장이 위조된 것인가 ? " "회사 도장은 매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조된 것이 아니다." 그러자 법원장은 자신 만만하게 말했다. "우리는 회사 도장만 인정한다. 회사 도장이 가짜가 아니라면 서명의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이 계약서는 유효하다."
법원장은 계속 물었다. " 인민폐 120 만元이 당신 회사의 은행 구좌로 입금되지 않았느냐 ? " 고사장은 "당연히 그렇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법원장은 " 그렇다면 은행은 책임이 없다. 돈이 당신 회사의 부총경리 개인 구좌로 빠져 나간 것은 당신 회사의 관리불량 책임이다." 라고 더욱 큰소리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부하 직원이 은행과 짜고 회사 명의로 돈을 빌려간 다음 그 부채를 대만회사 사장에게 뒤집어씌우는 사례는 아주 많이 발생한다. 화가 난 高사장이 현지 인사에게 "법원장이 어느 대학의 법학과를 졸업 했느냐." 라고 묻자 현지 인사는 "법관하는데 무슨 대학졸업이 필요한가? 공산당원으로 약간의 관계만 좋으면 단기간 훈련받고 임명이 가능하다.
심판해 가면서 배우면 되지. 어떻게 판결하냐고? 그런 것은 領道한데 물어보면 돼!" 라고 냉소했다.
高사장은 이 사건을 다시 현지 공안부서에 신고하였으나 공안은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全國人大(입법기관, 국회와 유사)의 모 인사가 적극적으로 관여해서 로비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관련 기관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질질 끌다가 흐지브지 끝내 버리고 말았다.
高사장이 아무리 증거를 제시해도 河北성 전체 상하 모든 기관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 사건을 경제 분규로 취급해서 형사 안건으로 처리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모 유력 인사의 도움을 청하자 대만판공실의 전 주임이었던 楊斯德이 대만 판공실의 국장, 처장들을 데리고 三河시에 내려와 사건의 전말을 청취하고 돌아갔다.
三河시 시장은 9월 21일 회의 중 공안국에 曾, 岳 두 사람을 체포해서 사건을 종료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1 개월이 지나도 공안국은 그들을 체포하지 않았다. 오히려 "中意공사 직원들이 수백명인데 우리 형사들 겨우 4명에 불과하다. 무리하게 공장에 진입했다가 잡히거나 실종 또는 살해되면 우리가 어떻게 그들의 가족들을 대할 면목이 있겠는가? " 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曾, 岳 두 사람을 체포하지 않으면 사건이 종료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잡히기는커녕 여러 가지 수단으로 高사장의 회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고사장은 더 이상 회사를 경영해 나갈 수 없었고 계속적인 압박을 받아 끝내
高사장은 다시 대만의 국회의원, 중국의 대만 판공실 등 유력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河北성 政法委가 신속하게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도 전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은 조사 결과가 高사장의 주장과 다르고 또 은행과 당사자들이 명확한 서면자료를 제출하지 않아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高사장을 더욱 분노케 하는 것은 高사장의 법률고문이었던 張夢祥 변호사가 高사장의 이름을 이용해서 현지 신문에 燕郊개발구의 투자 환경이 우수해서 투자 후 1년 만에 전 투자금액을 회수하였다는 글을 게재하여 대만 기업들을 계속 속여서 끌어 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느 대만 업체가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이 어느 누구를 망하게 만들고 싶으면 그가 중국에 가서 투자하도록 만들면 된다."高사장은 대만동포 투자보호법이 유명무실하기 때문에 대만 투자 업체들은 그야말로 힘없는 먹잇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자료원 ; 대만의 중국투자 피해자 협회 고위방 회장)
출처 : 칭다오 도우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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