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중국과 친해지기

[스크랩] [외부칼럼]중국함정6-돈 뺏고 감옥에 가두기

주님의 착한 종 2007. 1. 9. 08:35
대만의 張仲新 사장은 蔣經國 전 대만 총통(대통령) 비행기의 조종사 출신이다. 1993 년 공군에서 제대하고 인조 모피 공장을 운영하다가 1997 년 北京에 단독 투자해서 PP 플라스틱 인조모피 공장을 설립, 중국 내 여러 학교 운동장 트랙에 쓰이는 인조 잔디를 만들어 팔았다.

장사장의 제품은 기술이 독특하고 품질이 우수해 장사가 아주 잘됐다. 그 무렵 山東省 泰山體育器材 集團의 卞克良 동사장의 열정적인 초대를 받아 그를 찾아간 다음, 卞동사장과 함께 공동투자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2002년 5월16일 江蘇省 樂利市에 합자회사 樂陵泰山 場地材料工程有限公司를 설립하였다.

張中新은 생산설비와 기술, 그리고 이미 확보하고 있는 오다를 자산으로 투자하여 30 %의 지분을 갖고 총경리를 맡아 생산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중방 측은 공장 건물, 사무실, 현금을 출자하여 董事長(법인대표)를 맡고 회사의 전반적 관리와 재무, 회계를 책임지기로 했다.

장사장은 자기가 北京에 가지고 있던 사무실 집기, 컴퓨터, 차량 등을 인민폐 100 만元 (한화 1억3천 만원 상당)을 받고 새로 설립한 회사에 팔기로 했다. 중방 측은 대금을 차후 현금으로 지급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장사장은 태산 체육기재 집단이 대규모의 전문회사여서 상당히 많은 단골 고객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와 합자투자를 결심하였다. 큰 회사가 뒤에서 받쳐주면 아주 빠르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사장은 중방 측이 엄청난 음모를 숨기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중방 측은 약속대로 출자하지도 않았고 지불하기로 한 사무집기, 차량 등의 대금도 지불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행과 결탁하여 합자회사 명의로 인민폐 8,000 만元 (한화 100 억원 상당)을 빌려 제 멋대로 써버렸던 것 이다.

어느 날 장사장은 지방의 고객회사를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 공장 문이 굳게 잠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공장이 2003년 10월 10일 이미 영업을 종료했다는 것이었다. 설립한지 1년 3개월 만에 총경리인 자신도 모르게 문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화가 난 장사장은 卞동사장을 찾아가 따졌다. 卞동사장은 “회사가 빚이 많아 파산했으니 당신은 빨리 대만으로 돌아가라“ 라고 말했다. 어쩔 수 없게 된 장사장은 北京의 변호사를 찾아가 상의한 다음, 2003년 11월 12일 山東省 德州市 중급인민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사실 대만인 또는 외국인이 중국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이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 사건도 담당 법관이 北京까지 장사장을 찾아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재판이니 소송을 취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장사장은 현지 중급법원에서 재판해 가지고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장사장은 상대방이 현지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휘두르는 토착 세력이기 때문에 보다 공정한 재판을 받기 위해 이 안건을 상급법원인 山東省 고급 인민법원으로 소송을 이전하였다. 그리고 德州市 중국법원에도 이 소송을 상급법원으로 이전한다고 알렸다.

그러자 중방 측의 卞동사장은 위기감을 느끼고 먼저 초 강수를 썼다. 樂利시 공안국과 德州시 공안국 그리고 자신의 하수인들을 시켜 장사장을 붙잡아 山東성 德州시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특별한 죄목이 없었기 때문에 공금남용이라는 누명을 씌워 체포하였다.

그러나 장사장이 공금을 남용했다는 것은 卞동사장이 장사장에게 주기로 약속만하고 실제로는 주지 않고 있었던 사무비품, 차량 등의 구매비용을 미리 앞당겨 쓴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공금남용 죄가 될 수 없었다.

중방 측은 합자회사 명의로 많은 은행돈을 빌렸는데 이를 장사장이 공금남용 해서 대만으로 돈을 가지고 도망간 것처럼 죄를 뒤집어씌워 사건을 종료시키고 돈을 착복할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중방 측은 처음 장사장을 감옥에 가둔 초기에는 변호사를 만날 수 있게 허용해 주었다. 그리고 소송을 취하하면 바로 대만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조건도 제시하였다. 그러나 장사장이 대만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자 변호사는 물론 가족조차도 그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장사장의 늙은 노모는 대만 입법의원들의 지원을 받아, 기자회견을 열어 아들이 중국 감옥에 갇혀 박해받고 있는 억울함을 대만 언론에 눈물로 하소연했고, 대만 해협회는 사건의 진상을 중국국가 대만판공실에 알렸다. 그리고 경제분규 협상전문가를 산동성으로 파견하여 일주일간 협상을 진행한 다음 장사장을 “取保候審” 형태로 빼내어 올 수 있었다.

取保候審은 무죄가 아니라 보석으로 풀려나 잠시 자유를 얻는 형태이다. 동 사건은 중국 중앙에서 관심을 가지게 되자 德州市 공안국이 더 이상 횡포를 부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덮혀져 가고 있다. 장사장은 자유를 찾아 대만으로 풀려 나올 수 있었으나 그가 투자한 자본금은 찾아 올 생각조차 할 수없는 실정이 되어버렸다.

대만의 중국 전문가들은 이러한 문제들이 수없이 되풀이되며 발생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중국이 해방되었지만 법치사회를 이룩하지 못함으로써 큰 특권이 작은 특권을 괴롭히고, 작은 특권은 또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현상이 나타났다.

鄧小平이 경제 개혁을 이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치 개혁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오히려 경제 개혁으로 만들어진 각종 이익들이 정부관리들의 부패를 가속화시켰고 개인적 양심과 사회적 윤리의 타락을 초래하였다.

이 같은 부패로 인해 많은 재산을 가졌으나 권력이 없는 대만 기업들, 그리고 미국, 일본, 동남아 등지의 화교 및 외국 기업들까지도 뜯어 먹기 만만한 사냥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료원 ; 대만의 중국투자 피해자 협회 고위방 회장)
(작성 : kotra 고객센터 이송 중국 전문 고객자문역)
출처 : 칭다오 도우미 마을
글쓴이 : 스프링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