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오 하느님

2020년02월21일 금요일 - 성 베드로 다미아노 주교 학자

주님의 착한 종 2020. 2. 21. 07:53



축일:2 21

성 베드로 다미아노 주교 학자

ST. PETER DAMIAN

St. Pedro Damianus

San Pier Damiani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1007 at Ravenna, Italy -

22 February 1072 of fever at Ravenna

while surrounded by brother monks reciting the Divine Office

Beatified:wasnt

Canonized:never formally canonized;

cultus developed almost immediately after his death;

cultus approved and extended to the whole Church in 1823 by Pope Leo XII

 


어쩌면 베드로 다미아노는 자신이 고아였고

그의 형들 가운데 한사람에게 천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에게 그토록 친절했는지 모른다.

가난한 사람 한두 명과 함께 자기 식탁에 앉는 것이

그에게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그들의 요구에 직접 봉사하기를 즐겨했다.

 

베드로는 라벤나의 대주교인 다른 형의 보호를 받게 되자

그를 박대하던 형의 무관심과 가난에서 벗어났다.

라베나의 대주교는 그를 좋은 학교에 보내 주었고

그리하여 베드로는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베드로는 이 시기에 벌써 자기 자신을 엄격히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속옷으로 거친 모직 샤쓰를 입었고 철저한 단식을 했으며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냈다.

그러다가 그는 폰테 아벨라나에 있는 성로무알도의 개혁 베네딕토회에 들어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들의 한 은수처에서 두 명의 수도자가 짝을 이루어 살았다.

베드로는 기도에 지극히 열심이었고 잠도 조금밖에 자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서 심한 불면증으로 고생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에도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성서 공부를 했다.

 

수도원장은 자기가 죽으면 베드로로 하여금 그 뒤를 계승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원장이 된 베드로는 다섯 개의 다른 은수처를 찾았다.

또한 그는 수사들에게 기도와 고독한 생활을 고취시켰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청에서는 정기적으로 그를 불러들여서

시비 중에 있는 두 수도원 사이, 아니면 로마와 일치하지 않는 성직자나

정부 관리들과의 화해나 문제해결을 위탁했다.

 

결국 교황 스테파노 9세는 베드로를 오스티아의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는 성직 매매를 근절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며,

자기 사제들에게 독신 생활을 지키도록 격려했고,

심지어는 교구 사제들에게까지도 공동 생활과 기도 및

수도 생활의 규정을 지키도록 요구했다.

그는 불필요한 여행을 하거나 청빈을 거스르고

너무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 등을 삼가 하면서

수사들과 사제들에 대한 본래의 규율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했다.

심지어 그는 베상송의 주교에게 감사 위원들이 성무일도의 시편을 노래하면서

앉아 있는 것을 불평하기까지 했다.

 

그는 많은 편지를 썼는데 약 170편이 현재 남아 있다.

우리는 또한 그가 쓴 53편의 설교와 7편의 전기를 가지고 있다.

그는 저술에 있어 이론보다는 예증과 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그가 쓴 전례서는 그의 라틴 문체에 대한 재능을 뚜렷이 드러낸다.

 

그는 오스티아의 추기경직에서 은퇴할 것을 허락해 주도록 자주 청했으며

결국은 알렉산데르 2세가 그것을 허락했다.

베드로는 다시 수도자로 돌아온 것을 좋아하였으나

여전히 교황 사절로서 봉사해야 했다.

라벤나의 교황 사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열병으로 쓰러진 그는

자기 주위에 모인 수사들과 함께 성무일도 를 바치면서

1072 2 22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1828년에 레오 12세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베드로는 개혁자였다.

만일 그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면 그는 분명히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한 쇄신 작업을 장려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오늘날 수많은 수도 공동체에서 세운 특별한 기도의 집과 마찬가지로

사제, 수도자,남녀 평신도가 함께 참여하는 기도의 모임이 점점 증가하며

기도를 강조하는 것도 매우 환영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미국에서만도 2천만 명으로 보고되는 불면증 환자들을

잘 이해하는 수호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덕행의 표양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충실히 전해 주자’ -성베드로 다미아노. -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