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11월20일
발로아의 성 펠릭스
San Felice di Valois
St. Felix de Valois, C
1127 - 1212
마타의 성 요한과 발루아의 성 펠릭스의 만남
- by Vicente Carducho_in Museo del Prado
프랑스 태생의 성 펠릭스는 어려서부터 자선을 베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의 이름 앞에 발루아라는 지명이 붙은 이유는
그의 출생지가 발루아 지방이라는 의견과 발루아 왕가의 인척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지만 대체로 출생지와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신학을 배워 사제가 되었으나 평소 동경하던 은수 생활을 위해
파리 북동쪽에 있는 모(Meaux) 교구 내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고행하며
기도와 관상 생활에 전념했다.
그가 세속을 등지고, 세상도 그를 거의 잊어갈 무렵
마타(Matha)의 성 요한이 그를 찾아왔다.
성 요한은 파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갓 사제품을 받은
귀족 출신의 젊은 신부였다.
성 요한은 첫 미사 중 탈혼 상태에서 본 환시를 통해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모슬렘에게 노예로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을
해방하는 일에 헌신하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 노예 해방을 위한 수도원 설립을 위해
먼저 기도와 단식을 실천하며 성령의 이끄심을 찾고자 한다고 했다.
그래서 성 펠릭스는 성 요한을 제자로 받아들여 그를 지도하며
함께 수도회 설립에 관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어느 날 성 펠릭스와 성 요한이 샘 근처에서 영적 문제와 노예가 된 신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숲속에서 큰 사슴 한 마리를 보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그 사슴의 뿔 사이에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십자가가 빛나고 있었다.
수도회 설립 의지를 더욱 굳힌 두 성인은 1198년 로마에 가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수도회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것이 ‘삼위일체 수도회’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았던 십자가는 수도복의 상징이 되었다.
초대총장으로 뽑힌 성 요한은 교황의 축복을 받고 파리로 갔고,
이미 고령이었던 성 펠릭스는 파리 북쪽에 있는 세르푸와(Cerfroid) 숲에 설립된
삼위일체 수도회의 첫 수도원에서 수련원장으로서 지원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성 요한이 주로 에스파냐와 북아프리카에서 활발히 노예 해방을 위한 활동을
전개할 때, 성 펠릭스는 세르푸와에서 수도자를 양성하고
파리에 성 마투리누스수도원을 세우는 등 활발히 활동하다가
1212년 11월 4일에 세르푸와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성 펠릭스가 선종한 지 채 30년이 지나지 않은 1240년경
삼위일체 수도회에는 6백여 명의 수도자들이 있었으니 큰 성공을 거둔 셈이다.
회원들은 성 펠릭스와 성 요한이 1262년 교황 우르바누스 4세에 의해
시성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1666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그들에 대한 공적인 공경을 승인했다.
성 펠릭스의 축일은 1679년 로마 전례력에 포함되면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에 의해 11월 20일로 변경되었다.
이는 그의 선종일인 11월 4일이 밀라노의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 축일과
겹쳤기 때문이다.
1969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 개혁 이후,
다시 그의 축일을 선종한 날인 11월 4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하늘을 향한 마음 > 오 하느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을 통하여 살고 (0) | 2019.11.20 |
---|---|
11월20일 말씀과 묵상 - 미나의 비유 (0) | 2019.11.20 |
미사 - 2019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0) | 2019.11.20 |
11월19일 말씀과 묵상 - 예수님과 자캐오 (0) | 2019.11.19 |
성인 - 11월19일 성녀 메히틸다 (0) | 2019.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