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8월 1일
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Sant' Alfonso Maria de' Liguori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Saint Alphonsus Liguori
ST. ALPHONSUS MARIA De LIGUORI
(Napoli, 1696 - Nocera de' Pagani, Salerno, 1 agosto 1787)
Born:1696 at Marianelli near Naples, Italy
Died:1787 at Nocera
Venerated:1796 by Pope Pius VI
Beatified :1816
Canonized:1839 by Pope Gregory XVI
Alfonso = valoroso e nobile, dal tedesco(noble ready; battle ready)
윤리 신학의 수호자, 고해사제의 수호성인
1730년부터 90년에 이르는 동안 사제로서 유명한 분으로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가 있다.
이분은 1696년 9월 29일 이탈리아의 나폴리 부근 마리아넬리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고귀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재산은 보통 정도에 불과했다.
알폰소는 일곱 자녀 중에서 장남이었다.
알폰소의 탄생 후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예수회의 성인 같은 신부가 와서 그 어머니에게
이 아이는 90세까지 오래 살아 주교가 되어서
하느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은 후에 어김없이 적중되었다.
알폰소는 하느님의 보호아래 정성어린 어머니의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성체 성사와 성모께 대한 신심이 두터웠다.
학교 성적도 매우 우수했으며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는 법학을 전공해
일찍이 법학 박사의 학위를 획득했다.
그는 장래에 정치가가 되려 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붙임성 있는 성품인 그는
사람들이 신망과 호평을 받았으며,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빈민을 돌보며 병자를 방문했다.
그러니 가는 곳마다 존경을 받게 되었고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와 같이 환했으므로
매우 만족한 그의 아버지는 하루 속히 그를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알폰소는 그것을 쉽게 승낙하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게 반대하는 태도도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 시련을 주셨다.
그것은 어떤 중대한 소송 사건인데 그의 생각은 꼭 승소였다.
그런데 우연히 중요 서류의 미비 관계로 그만 패소 당하고 말았다.
이를 대단히 수치스럽게 생각한 알폰소는 법정을 나오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방문을 잠그고 이틀 동안이나 단식을 하며 울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건강을 염려해 여러 가지로 달래서
다시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돌변했다.
그는 변호사직을 버리고 그 후부터는 신앙의 길로만 나아갈 결심을 했다.
어느 날, 불치병자만 수용하는 요양소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알폰소는 돌연 지진과 같은 강한 충격을 두 번이나 받았다.
"세상을 버리고 나를 따라라"하는 확실한 이런 엄숙한 말씀을 들었다.
그는 그 말씀을 따라 곧 수도원을 결심을 했다.
아버지는 원래부터 그것을 반대했고,
적어도 그런 결심의 이행을 나중으로 미루도록 권고했으나,
서품준비 하기를 열망하는 그의 원의 만은 아버지인들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준비를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하며 고행을 했고
틈만 있으면 아이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곤 했다.
1726년 마침내 알폰소는 바라던 신품을 받게 되었다.
그의 독실한 인품을 아는 신자들은 그의 미사에 참여하고
그의 강론을 듣고 그에게 성사를 보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그가 애정으로써 순순히 설교하는 말씀에는 설복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는 어떤 사제회에 입회해 사방을 다니며 묵상회를 열었다.
포디아에서 묵상회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알폰소가 열심히 묵상회원들을 지도하고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즉 그가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 성상이 미소를 띈 사건이다.
이러한 일은 그의 일생에 있어 여러 번 있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하심으로 또 한가지 사명을 맡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수녀가 묵시를 받은 것인데
그것은 많은 신부들이 알폰소를 둘러싸고 묵상회,
특히 배우지 못한 이들을 상대로 묵상회를 여는 광경이었다.
그 수녀는 이 이야기를 알폰소에게 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충분한 조사도 없이 어떤 환상만을 믿고
그대로 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학자들과 유지들이 그에게 수도원을 창립하기를 권고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임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고,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는 아버지와 이별하고 독실한 동료 수명과 더불어
외떨어진 깊은 곳으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엄격한 생활로써 장래활동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런 곳에도 시련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간에는 그 회의 목적과 활동 범위가
기타 활동 방법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그 결과 알폰소를 야심가 혹은 고집쟁이라고 욕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의 사업은 정신 이상자의 꿈과 같다고 조소하는 이도 있었다.
성인은 역시 성인으로서의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조소 중에도 알폰소는 아무 말없이 참고
겸손으로 자기를 훼방하는 이들을 애정으로 대해주며,
오로지 모든 것을 하느님과 성모게 의탁했다.
이러한 시련은 그의 일생을 통해 중단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가 타인의 존경을 받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는 세 곳에 새 수도회의 수도원을 설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 중 두 수도원은 박해로 인해 폐쇄되고 말았다.
물론 그 후에 새 수도원이 설립은 되었지만...
지금 그 수도회는 각국에 진출해 그 회원들은 오늘도
열심히 묵상회 지도자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창립자의 정신에 입각해 설교, 저서, 교수로서 전교를 하고 있다.
실지 알폰소는 일생을 통해 많은 설교를 하고
허다한 신심서와 심원한 신학서를 저술했다.
그가 교회 학자의 명칭을 받게 된 것도 실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성인은 고령에 달해 최후의 큰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성녀 아가타 대성전의 주교로, 다음 종신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런 중책을 물론 그는 원하지 않았으나 교황의 특별한 엄명이기에 수락했다.
어떻든 간에 그가 교황께 자기 수도회의 허가를 얻은 것은 1749년의 일이다.
그래도 나폴리 정부에서는 인가를 좀체로 내 주지 않았다.
1779년에 겨우 그 숙망을 달성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는 중병으로 눕게 되었으므로 일체를 타인에게 위임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용이하게 인가를 얻기 위해 마음대로 회칙을 변경해 버렸다.
이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고 알폰소가 이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정부는 그 변경된 회칙대로 인가를 내렸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창립자는 괴로웠다.
그 괴로움은 회원 일부가 새 회칙을 따라 분리 탈퇴함으로써 더욱 심각해졌다.
교황은 나폴리 왕국 내 수도원의 수사들을 전부 제명시켜 버렸다.
그 중에는 알폰소도 끼어 있었다.
이러한 소식들은 그에게 극도로 괴로움을 주었다.
그는 묵묵히 심중의 비애를 억제하며 겸손한 태도로 그 말씀에 순종했다.
그의 번민과 고통은 그 뒤에도 많았다.
게다가 그의 신병은 1787년, 그가 임종할 때까지
끊임없이 그의 육신을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알폰소의 임종일은 8월 1일 삼종의 종이 울릴 무렵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에 대한 존경심은 더욱 커졌다.
전에 그 수도회를 탈퇴한 수사들은 4년 후 다시 귀환해
본 회칙대로 수도 생활에 노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알폰소는 1816년에 시복되었고, 1839년에 시성되었으며,
1871년 비오 9세 교황으로부터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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