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오 하느님

성인 - 1월 28일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주님의 착한 종 2018. 1. 28. 09:39


축일 : 1 28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St. Thomas Aquinas

San Tommaso dAquino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Also known as

Doctor Angelicus; Doctor Communis; Great Synthesizer;

The Dumb Ox; The Universal Teacher

c.1225 at Roccasecca, Aquino, Naples, Italy -

7 March 1274 at Fossanuova near Terracina of apparent natural causes;

relics at Saint-Servin, Toulouse, France

Tommaso = gemello, dall''ebraico(binoculars, from the Hebrew)

Canonized :1323



Scene from the Life of St Thomas Aquinas (detail)-LIPPI, Filippino

1489-91. Fresco. S. Maria sopra Minerva, Rome

 

이탈리아 아퀴노 교외 로까세까()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는

아퀴노의 란둘프 백작의 아들이며, 로마 황제와 프랑스의 왕

그리고 태오도라와 친척이었다.

그는 불과 다섯 살의 나이로 몬떼 까시노의 베네딕또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고, 1239년경에는 그의 교육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나폴리 대학교를 다녔고,

1244년에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칸이 되었다.

이때 가족들은 그를 강제로 데려다가 15개월 동안이나

로까세까성에 감금시킨 적도 있었다.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1245년에 다시 수도회로 돌아갈 수 있었고,

1245년부터 3년 동안을 파리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파리와 쾰른에서 성 알베르또()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여,

125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250년과 51년 사이의 어느 대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그 후에는 주로 나폴리, 아나니, 오르비에또, 로마

그리고 비떼르보에서 가르쳤으며,

1259~68년 사이에 "숨마 꼰뜨라 젠띨레스"를 마루리 지으면서,

저 유명한 "숨마 테올리지까(Summa Theologica.신학대전)"저작에 착수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1269년에는 수도사제와 교구사제간의 논쟁에 말려들었고,

시제르 브라반트와 요한 펙캄 그리고 파리의 탕피에르 주교의 철학적인

가르침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리용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희랍과 라틴 교회의 재일치 가능성을

토의하라는 부름을 받았으나, 리용으로 가는 중에 테라치나 교외

포사 누오바에 있는 시토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323년에 요한 2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비오 5세에 의하여 교회박사로 선언되었고,

1880년에는 레오 13세에 의하여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의 칭호는 "보편적인 박사"(Doctor Communis)이다.

레오 13세는 모든 신학생들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는

"에떼르 빠뜨리"칙서까지 반포하였다.

그의 주요 사상은 곧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지이며,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징 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이다.

그의 "마늄 오뿌스"와 미완성의 대작인 "신학 대전"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질 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지적 능력 이외에도, 아퀴나스는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다.

그는환시, 탈혼 그리고 계시를 체험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몸"축일 성무일도를

집필했고, 지금의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찬미가, 예컨데 "빤제 린과,

베르붐 수뻬르눔, 라우다 시온, 아도로 떼 데보떼 등을 썼다.

또한 그는 주의 기도, 사도신경 그리고 성서 일부에 대한 주해서를 썼다.

한마디로 그는 지성과 성덕의 금자탑이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