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12. 영원한 오명(汚名), '본시오 빌라도'
▲ 본시오 빌라도, 지오토(Giotto), 1305
교회는 파스카 성삼일 동안 예수의 마지막 지상생활에 대해
기념하고 전례를 통해 성대하게 경축합니다.
성주간을 포함해서 파스카 성삼일 동안 전례를 통해
자주 듣게 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또한 그리고 매 주일 미사에서 신경(信經, Credo)를 바칠 때마다
되뇌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바로 본시오 빌라도(Pontius Pilatus)입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저 신경을 통해 예수께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에서 수난을 받으시고...”와
그가 주재한 재판에서 예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는
복음서의 진술이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본시오 빌라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미사 때마다 불리는 오명, 본시오 빌라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대의 통치자가 된
헤로데의 장남 아르켈라오스(마태 2,22)가 폐위된 후,
유대지방은 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재위 14-37년)는 빌라도를
전임자인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의 뒤를 이어
서기 26년, 제5대 유대 총독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는 앞선 다른 유대 총독에 비해 유례없이
장기간(26-36년) 유대를 통치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모든 활동기간이
그의 총독 재임기간에 이루어졌습니다.
빌라도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와 유대 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기원전 15-기원후 45년)의 기록,
그리고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37-100년)와
로마의 역사가 타치투스(56-120년)의 진술을 통해
단편적으로 그에 대해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전통적으로 역사학자들은 빌라도의 출생지를
비센티(Bisenti)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비센티 지방은 현재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조(Abruzzo) 지방에 해당합니다.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사>(Historia Ecclesiae)에서
그의 집이 비센티에 있었다고 전합니다만,
신빙성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어떤 역사학자는 그의 이름이 ‘필레우스’(Pileus)에서 왔다고 보고,
그가 귀족이 아닌 자유인 출신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필레우스’는 로마시대에 ‘자유를 얻은 노예’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증거로 그가 자유인 출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탈리아 남부에 살던
호전적인 고대부족인 ‘삼니움족’(samnites)의 씨명이
‘Pontii’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의 근본이 바로 이 ‘삼니움족’으로부터
기인했다고 추정하는 이유입니다.
빌라도가 유대 총독이었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그 증거는 복음서뿐만 아니라,
1961년에 발견된 헌정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헌정비는 로마제국 당시 남부 유대지방의 수도였던
체사레아(Caesarea)의 고대 원형극장 터에서 발굴되었는데,
비록 온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헌정비에 남아있는 글귀
“...ECTVS IUDA...” 즉 (PREF)ECTUS IUDA(EAE) ‘
유다 총독’이라는 뜻으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헌정비는 당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헌정하기 위해
유대 총독 빌라도가 만들었다는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
▲ 빌라도에게 재판받는 예수
복음서에서 전하는 빌라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4개 복음서는 모두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빌라도가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하며
그 표지로 ‘자신의 손을 씻었다’(마태 27,24)고 전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가 수석 사제들의 시기심 때문에
자신 앞에 끌려왔음(마르 15,10)을
빌라도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군중들을 만족시킬(마르 15,15) 요량으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는 판결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루카 복음서는
빌라도가 예수께서 로마에 대항할 음모를 꾸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행동에서 그 어떤 죄목도 발견하지 못했음(루카 23,14)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서는 빌라도가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요한 18,36)하고
유대인들에게 선언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에우세비우스의 <유대 고대사>에 따르면,
본시오 빌리도는 당시 체사레아에 있던 헤로데의 궁전을
총독관사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헌정비’가 체사레아에서 발견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체사레아에는 약 3천여 명의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 군인들은 종종 유대 축제 기간에 맞춰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축제기간에 예루살렘에는 많은 뜨내기들이 모여들었고,
그로 인해 소요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빌라도의 만남은 이런 분위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폭동의 낌새를 알아차린 빌라도는
예루살렘 대성전 옆에 지은 안토니우스 요새에 머물며
예수를 심문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를 통치하면서 유대인들과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의 성품에 기인했습니다.
필로는 저서 <로마 황제 가이우스에게 보낸 특사> 에서
빌라도를 완고하고 냉혹하며 강퍅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를 싫어했던 이유는
단지 그의 성품 때문만은 아닙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감성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따르면,
빌라도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티베리우스 황제의 형상을 본뜬 방패와 군기(軍旗)를 제작해
예루살렘 곳곳에 내 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젤롯당원 몇이 주동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소요를 일으켰는데,
이에 빌라도는 그들을 모두 참살하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추후 티베리우스 황제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원성을 잠재울 요량으로
방패와 군기를 철수시킬 것을 명령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빌라도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서가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전달되었고, 이에 빌라도는
자신의 자리를 잃을까 노심초사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의 성품은 루카 복음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루카 13,1)은
그의 통치 스타일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필로에 따르면, 결국 본시오 빌라도의 통치는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그 막을 내리게 됩니다.
빌라도의 측근 가운데 하나가 ‘사마리아 사람들을 속히 제압하도록’
그를 부추겼습니다.
또한 이 측근은 사마리아에 위치한 ‘그리짐산(山)에
모세가 숨겨놓은 십계명을 적은 돌판을 손에 넣으면
빌라도의 자손들 대대손손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전해질 것’이라고 꼬드겼습니다.
그리짐산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을 전했던 장소입니다(신명 11,29 참조).
빌라도는 결국 그 꼬임에 넘어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응답했습니다.
분노한 사마리아 사람들은 당시 시리아에 파견되어 있던
황제의 특사 비텔리우스에게 자신들의 행동이 정치적인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빌라도를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비텔리우스는 로마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를 통해
빌라도의 실정(失政)을 알렸고,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빌라도를 유대 총독자리에서 끌어내고 그를 로마로 소환했습니다.
하지만 처벌이 두려워 소환을 차일피일 미루던 빌라도는
결국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은 다음에야 로마로 귀환했습니다.
빌라도는 매우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따르면,
빌라도가 칼리굴라 황제 (재위 37-41년) 치하에서 변방을 떠돌다가
결국 프랑스 지역으로 유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답니다.
어떤 자료에는 빌라도의 시신이 티베리아 강에 던져졌다고 하고,
또 다른 자료에서는 프랑스 론알프 지역의 론강에 수장시켰다고 합니다.
물론 모두 전설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 재판후 손을 씻는 빌라도.
(The Liege Psalm book, Belgium, 13th century)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동방 정교회 일부에서 빌라도와 빌라도의 부인인 클라우디아 프로쿨라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를 근거지로 삼는
하베샤 교파, 일명 아비시니아 교파라고도 하는 이 교파는
예수에게 무죄를 선고하려 했던 빌라도의 노력과 관대함으로 비추어 봤을 때,
빌라도가 예수 재판 이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의 축일을 7월 25일에 지내고 있습니다.
또한 빌라도의 부인 클라우디아 프로쿨라의 축일을 10월 27일에 경축합니다.
이런 평가에 대해서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리게네스는 저서 <마태오 복음 강해>에서
빌라도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전합니다.
또한 테르툴리아누스와 순교자 유스티노 모두
빌라도가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보낸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관한 보고서>의 내용을 언급하며,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들이 인용한 빌라도의 보고서는
많은 부분이 외경(外經),
특히 <니코데모의 복음서>와 전설에 그 기반을 두고 있어서
빌라도의 이름을 빌려 후대에 누군가가 쓴 보고서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학자들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세대대로 오명(汚名)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교회의 첫 보편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공표한
신경(信經)을 개정한 제1차 콘스탄티노플 보편 공의회(338년)에서는
니케아 신경에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에서 수난을 받으시고”라는
표현을 덧붙임으로써 본시오 빌라도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히 기억될 이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김홍락 신부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Navotas)시 빈민촌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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