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스러지듯,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모습은 마치 별이 스러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과 죽어감>
‘평화로운 죽음’)
죽음의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평화롭고 존엄한 죽음이란 순간적인 사건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과 관련된다’고 했다.
우리가 병들어 죽어간다면 더더욱 죽음은 순간의 경험이기보다 진행과정으로 다가올 것이다.
나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다 마침내 그 죽음을 끌어안기까지, 죽음의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죽어간다.
그리고 죽어가는 동안, 누구나 편안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대다수가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죽어가는 과정이 죽는 순간보다 더 두려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죽음의 수용, ‘데커섹시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 <죽음과 죽어감> (이레,
2008)
평화롭게 죽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
그 개인에게서만 구하는
것은 지나치다.
적어도 죽기 전까지는 살고자 하는 욕망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접는 사람은 드물다.
살아 있는 존재인 한 살아남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죽음을 부정하면서 죽음과 처절하게 싸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시한부 환자들의 대부분은 결국엔 자신의 죽음을 수용한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노인이나
살아온 삶에 대해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은
수용의 단계에 좀 더 손쉽게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따름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는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찾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주변에 대한 관심도 차츰 잃어간다.
혼자 있고 싶어 하고, 바깥세상의 소식이나 문제들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는다.
병문안 온 사람들도 반기지 않고 설사 그들을 만나더라도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방문객의 수를 제한하거나 오더라도 너무 오래 머물지 않기를 원한다.
바로 이 시기가 환자들이 TV를 끄는 시점이다.
환자와의 대화는 보다 비언어적인 형태로 변화한다.
환자는 손짓으로
우리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하곤 한다.”(같은 책, ‘7.제 5단계: 수용’)
죽음을 수용한다는 것은 힘든 여행 끝에 휴식이 필요하듯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더는 행복과 불행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감정 부재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단계를 ‘데커섹시스(decathexis, 세상에 대한 집착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부른다.
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편안한 죽음에 이를 수 없다.
어떤 환자는 이 상태를 ‘기적’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토록 살아남고 싶어 했던 사람이 더는 삶에 집착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마음 편히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 하기
죽어가는 사람이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가까운 사람들의 이해와 도움이 절실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이 죽음을 수용했음에도 가족, 친구와 같은 주변 사람이
그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죽음이 임박한 상황인데도, 끝까지 죽음과 싸우는 환자를 추켜세우며 격려한다거나
죽음을 이미 받아들인 환자에게 가족을 위해서라도 생각을 바꿔야 한다며 매달린다.
주변 사람의 이 같은 태도는 오히려 환자의 편안한 죽음을 방해한다.
내 경우만 보더라도,
죽음을 앞둔 어머니에게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계속 살아주기만을 바랬다.
자녀에 대한 걱정 때문에,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심지어는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모든 의학적 시술을 다하려 했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저항을 곁에서 더 부추긴 셈이다.
나를 포함한 자녀들 모두, 어머니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려면
자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죽어가는 어머니를 진정으로 도울 수 없었다.
죽음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이나 죽음을 수용해야만 하는 사람이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우려면
말없이 그 사람 곁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대개는 잘 알지 못한다.
죽음의 의사가 충고하듯, 그냥 환자의 손을 잡은 채, 함께 창밖의 새소리를 들으며
끝까지 곁에 있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하는 것으로,
환자는 편안히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둬야겠다.
죽어가는 환자의 무기력한 일상
▲
별의 스러지고 난 후.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는 병원 침상에서 자고 먹었다.
주기적인 의사의 회진, 간호사의 채혈, 혈압과 맥박 체크를 받았다.
그나마 기력이 좀 있을 때는 병원 복도를 오가거나
병실 텔레비전을 보거나 곁을 지키는 가족이나 병문안을 온 사람들,
그리고 같은 처지의 환자들과 간단하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니의 일상이란 참으로 단조로운 것이었다.
매일 매일이 얼마나 지루했을까!
닥쳐올 죽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하루하루의 무기력한 생활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비록 목전에 죽음을 두고 있을지라도, 죽어가는 환자는 아직 죽지 않았고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한 채, 삶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성큼 다가선 죽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오히려 남은 삶이 더 소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도움 없이는 품위를 유지할 수도 없는데,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듯할 때,
육체적 고통에 심적 고통까지 더해져 남은 삶은 더 견디기 힘들 수밖에 없다.
죽기에 앞서 이미 삶 밖으로 내팽개쳐지는
느낌 때문이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더는 삶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흔히 죽어가는 환자는 생각도 없고, 느끼지도 못하며, 원하는 것도 없는 존재처럼 다룬다.
그래서 시한부 환자는 그만큼 더 절망하고 더 두렵고 더 외로울 것이다.
하지만
모든 환자가 무력한 존재는 아니다.
여기서 죽음의 의사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모든 환자에게는 평화롭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
환자 자신의 욕구가 우리의 욕구와 정반대의 것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환자들은 육체적으로 병을 앓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스스로를 위해 중대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의 소망과 의견은 존중되어야
하며 귀 기울여주어야 하고 논의되어야 한다.
환자의 소망이 우리의 믿음이나 종교와 상반되는 것이라고 해도
그 문제에 관해 툭 터놓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어떤 치료를 받을 것인지, 더 치료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환자의 뜻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환자들 중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같은 책, '9. 환자의 가족')
제각기 다른 삶을 살아왔듯이 각자 다르게 죽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개성 있는 삶을 살아온 것만큼이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삶의 마무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오늘날 병원에서의 죽음과 죽어감은 삶의 절정이자 마무리로서의 의미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획일적이고 비인간적이다.
평화롭게, 편안하게, 품위를 지키며 나답게 죽어가기 위해서는
죽음 준비를 위한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대하는 주변사람의 태도,
죽어가는 공간 등에 대한 고민이 함께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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