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레지오 수도회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루카 20장 27-40절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사별의 슬픔에 잠겨있는 분들을 위해
가끔씩 사별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해내고 계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 슬픔의 깊이가 얼마나 깊던지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을 달래드리기 위해, 힘을 넣어드리기 위해 ‘생쑈’를 다해보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의 부재(不在)로 인한 상실감이 얼마나 컸으면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마저 슬픈 소리로 울었습니다.”(김춘수, 부재)
슬픔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덜어낼 수 있는 슬픔이고, 또 하나는 덜어낼 수 없는 슬픔입니다.
덜어낼 수 없는 슬픔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위로해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한분 예수님만이 가능합니다.
그분은 인생의 슬픔과 고통의 참의미를 잘 아시는 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신 온몸으로 직접 맛보셨던 분,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에게는 ‘깊은 슬픔’이 필요합니다.
그 깊은 슬픔은 우리를 다시 한 번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 아무리 큰 슬픔이라도 하늘이 고칠 수 없는 슬픔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살다가 슬픔을 겪게 되거든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슬픔 고스란히 안고서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참 신앙을 소유하신 분들,
참 하느님을 온 몸으로 느끼신 분들,
부활신앙을 사시는 분들,
이런 분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닙니다.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더 이상 비탄의 눈물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 더 이상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더 이상 죽음이 그들의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습니다.
살아도 주님의 것, 죽어도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은 그저 자비하신 하느님의 품으로 건너가기 위한 축복의 사다리입니다.
매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눈앞에 뵙듯이 살아가기에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하루를 허락하시면 허락하시는 대로 감사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언젠가 때가 되어 불러주시면 기쁜 마음으로 일어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의 진수(眞髓)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창조하신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 세상이기에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깁니다.
매일 매 순간을 큰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비교하면 이 세상은 ‘새발의 피’입니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 보내놓고 극심한 고통 속에 계시는 분들,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가 없는 이 세상,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요.
그가 떠난 빈자리는 얼마나 휑합니까?
그가 겪었던 생전의 끔찍한 고통, 못 다 베푼 사랑, 해준 것 없는 나,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리십니까?
이런 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부디 안심하십시오.
그는 이제 남루한 이 세상의 옷을 벗고 불멸의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근심도 걱정도 눈물도 없습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품에 안겨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언젠가 하느님 아버지 품에 한 가족으로 다시 우리와 다시 만날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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