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중국과 친해지기

[중국 근대사] 난징대학살의 주범 다니 히사오

주님의 착한 종 2015. 10. 26. 08:35

 

형장으로 향하는 난징대학살의 주범 다니 히사오. 장군 신분을 고려해 형구를 채우지는 않았다. [김명호 제공]

 

 

1945년 11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중국 내 설립한 전범처리위원회는 베이징, 난징, 선양, 쉬저우, 지난, 타이베이 등 10개 도시에 전범구치소와 전범재판소를 개설했다. 그중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이듬해 2월 난징에서 개정된 전범심판 군사법정이었다. 재판장 스메이위(石美瑜, 1918∼1992)와 5명의 심판관, 2명의 검찰관으로 구성된 난징 군사법정은 피고인들의 면면이 다른 지역을 압도했다.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의 주범 다니 히사오(谷壽夫, 1882∼1947)와 학살계획의 입안자, 중국인 죽이기 경쟁을 벌여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지금의 每日新聞)에 대서특필됐던 일본군 장교 등 화제의 인물들이 중국의 특별 요청으로 도쿄에서 압송돼 왔기 때문이다. 이들 외에 거물급 중국인 첩자(漢奸)들도 난징 법정에서 심판을 받았다.

다니에 대한 심판은 2월 6일에서 8일까지 중산둥(中山東)로의 리즈서(勵志社) 강당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개정 첫날 1000여 명이 방청석을 메웠고 법정 밖에는 스피커를 설치했다. 육군 중장 다니가 지휘하던 일본군 6사단은 중화문(中華門)을 통해 난징에 입성한 후 28건의 단체학살을 자행했다. 19만 명 이상의 무고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살인 경기’를 벌였던 ‘황군(皇軍)의 영웅’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쓰요시(野田毅)도 6사단 소속 장교였다. 다니는 난징 공격은 시인했지만 민간인 학살은 부인했다. 학살 현장에서 목숨을 건진 100여 명이 증인으로 출석했고 발굴된 유골들 이 증거물로 제출됐다. 만행 장면을 찍은 기록물도 법정에서 상영됐다.

마침내 47년 3월 18일 군사법정은 다니에게 총살형을 선고했다. 4월 26일 다니는 중국 헌병들에게 이끌려 법정을 출발했다. 중산(中山)로에서 10년 전 만행이 있었던 중화문까지 군용 트럭 위에 앉아 중국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보기 위해 수만의 인파가 거리에 운집했다. 흥분한 모습을 보인 사람들은 없었고 거리는 정적에 휩싸였다. 트럭 위에 앉아 형장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은 지난날의 광란을 회상하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위화타이(雨花臺) 집행장에 도착한 다니는 중화문 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