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이 되기위해 가장중요한것은 신체조건이다.
고환은 반드시 없어야 되지만 그 이외에 어떠한 신체장애가 있으면 안된다.
왕과 왕의 여자들을 지키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조선환관들의 입궁시기는 8세 전후이다.
가난한 아버지는 풀칠을 하기 위해 자식의 고환을 명주실에 묶어 거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의 영등포 부근에 거세를 하기위한 움막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비가 오는날 시술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거세한다고 모두 환관이 될수있는것은 아니다.
신체검사와 구문시험을 통해 선발된 예비어린 환관들은 2차에서 혹독한 훈련을 한다.
내시부에서 심부름을 하며 기본소양을 쌓았으며 시도때도 없이 고참 환관들에게 고문과 같은
인내력 시험을 받아야 했다. 왕과 왕의 가족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비밀을 지켜내기 위한
재목을 시험하기 위한 수련과정들이다.
이래서 남은 어린환관들은 90명 정도.
금기사항을 어기면 심한 체벌을 받는데 그중 하나가 마늘을 먹지 않는것.
입냄새를 방지하기 위한것도 있지만 마늘이 양기를 돋구는 식품이기에 그러했다.
어린환관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건 공부였다.
왕의 그림자가 되려면 학식이 높아야하기때문이다.
덕분에 조선의 환관들은 학식이 높았다.
입궁후 10년이 지나야 정식 환관이 될수있는데 그전에 또 다시 신체검사를 다시 받아야한다.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혹은 권력을 잡기 위해 환관이 되려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때문이다.
수염이 나거나 신체적 결함이 있을때 출궁을 당했다.
거세를 했기때문에 피부가 비교적 얇았으며 하얗고 성격도 여성스런 환관들도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 그렇기도 했지만 성격이 장수와 같은 환관도 있었다고 한다.
환관중의 제일 높은 계급은 상선이다.(수라를 책임지는 상선.왕의 목숨과도 연결이 되있다)
상선이 되면 종2품의 품계를 받았는데 오늘날 차관급에 해당된다.
그 밑으로 59명의 환관이 품계를 받았으며 그 품계에 따라 일을 달리했다.
품계를 받지못하거나 수련을 받는 어린 환관들을 합쳐 평균 300명의 환관이 있었다고 한다.
대전침실을 지키는 환관은 궐내에서 생활하며 교대없이 하루종일 왕을 보좌했으며
그 나머지 환관들은 출퇴근이 가능했다.
조선환관은 월급을 받았는데 가장낮은 월급은 쌀 9말.
대전상선은 쌀1석1말.콩 10말을 받아 정10품 관료보다 많이 받았다.
많은 월급과 벼슬을 받을수있기에 조선의 서민들은 아들을 고자로 만들어 궁으로 보냈다.
조선의 환관은 궐내에서는 연애를 할수가 없지만
궁녀와 어릴적부터의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한 경우도 많았다.
세종때 젊은 환관이 궁녀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발각되어 참형을 당했다.
죄를 아무리 참혹하게 다뤄도 이런 연애사건은 조선의 역사에서 비일비재했다.
궐내 연애는 엄격하게 처벌되었지만 환관의 결혼은 가능했다.
평민이나 사대부 집안가문들이 환관을 통해 권력을 잡기위해 혼담이 오갔다.
실제로 사대부가문과 환관이 결혼해 권력을잡는경우가 많았다.
못마땅한 대다수 사대부 양반들은 환관결혼폐지의 상소문을 올렸지만
환관들의 반발과 그들의 공을 인정한 왕실의 비호로 그들의 결혼제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고환을 절제하는 시기가 아주 어릴적이 아닌 어느정도 성기가 발달한 자는 성생활이 가능했다.
물론 발기부전과 같은 현상이있지만 어느정도 부부관계는 가능했다.
부부관계를 할때 부인이 환관의 입을 천으로 동여맸다,
고환이 없어 사정을 못해 아내의 목덜미와 어깨를 물어버리기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칙이었다.
하지만 성생활에 만족을 못한 아내가 정조를 잃거나 이혼을 한 경우가 더러있었다.
대전환관이 가장 권력이 높았는데 왕의 수족으로 왕의 입과 귀가 되는 자리라
가장빠른 정보통이며 권력의 핵심이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종4품에 불과하지만 조정관료들이 대전환관들의 눈치를 보기도 했으며
갖은 유혹으로 정보를 빼기도 했다.
현재 남양주시에 있는 운담. 이집은 구한말 환관이 살던 종로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다.
조선환관들의 부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증명해준다.
권력이 있건없건 세월앞에서는 그들도 어쩔수없었다.
환관이 늙고 병들면 궐을 나와야했다,
퇴직을 하면 매달 쌀12말과 집을 마련해주어 노후보장은 되있었다.
지금 중랑구 목동..먹골마을에서 자신의 환관이었던 시절을 되새기며 노후를 보냈다.
은평구 백화산 뒷편.
환관문중묘역으로 이렇게 남아있는곳은 몇군데 되지않는다.
환관들이 죽으며 입양한 후손(환관)들이 무덤을 관리했지만
이런 환관역사는 조선이 무너지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비평가와네티즌이선정한 한국베스트명시모음☆
'하늘을 향한 마음 > 마음을 열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싫어 싫어 (0) | 2010.03.19 |
---|---|
어서와 햇살로 바람으로 (0) | 2010.03.19 |
에궁 ~~ 귀여워, 잠자는 모습들 (0) | 2010.03.18 |
내 가슴에 광고하세요. (0) | 2010.03.18 |
중년의 의미 (0) | 2010.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