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마음을 열고

나는 내가 아닙니다.

주님의 착한 종 2009. 2. 6. 11:21

몇 년전 천주교 압구정1동 성당의 주보 '겨자씨 난'에 실리면서

회자되기 시작하여 한 동안 인터넷을 달구었던

시를 한편 소개합니다.

 

이 시는 40대 직장인이자 남편 아빠 아들로서

삶에 대한 회의와 버거움, 자신의 무능력을 현실적으로 잘 그려냄과 동시에

직장 후배와 아내 아들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차분한 목소리로 읊고있습니다.

 

그러나 지은이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껴안을 수 없는/무능력한 사람이어도,/

그들이 있음으로 나는 행복"한 40대라고 자위합니다.

다음은 시 전문...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아내 앞에서 나는 나를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아내의 남편입니다.


명세서만 적힌 돈 없는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내밀며
내 능력 부족으로 당신을 고생시킨다고 말하며
겸연쩍어하는 아내의 무능력한 남편입니다.

 

세 아이의 엄마로 힘들어하는 아내의 가사 일을 도우며
내 피곤함을 감춥니다.

그래도 함께 살아주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아내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남편입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아이들 앞에서 나는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세 아이의 아빠입니다.


요것 저것 조잘대는 막내의 물음에

만사를 제쳐놓고 대답부터 해야 하고
이제는 고등학생이 된 큰 녀석들때문에

뉴스 볼륨도 숨죽이며 들어야 합니다.


막내의 눈높이에 맞춰 놀이동산도 가고
큰놈들 학교 수행평가를 위해 자료도 찾고 답사도 가야합니다.


내 늘어진 어깨에 매달린 무거운 아이들
유치원비, 학원비가 나를 옥죄어 와서

교복도 얻어 입히며
외식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생일날 케이크 하나 꽃 한송이 챙겨주지 못하고.
초코파이에 쓰다만 몽땅 초에 촛불을 켜고

박수만 크게 치는 아빠
나는 그들을 위해 사는 아빠입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어머님 앞에서 나는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어머님의 불효자식입니다.
시골에 홀로 두고 떨어져 있으면서도

장거리 전화 한 통화에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 불쌍한 아들입니다.
가까이 모시지 못하면서도

생활비도 제대로 못 부쳐드리는 불효자식입니다.

그 옛날 기름진 텃밭이 무성한 잡초 밭으로 변하여

기력이 쇠하신 당신 모습을 느끼며

주말 한번 찾아뵙는 것도
가족 눈치 먼저 살펴야 하는 나는

당신 얼굴 주름살만 늘게 하는 어머님의 못난 아들입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40대 직장(중견) 노동자입니다.


월급 받고 사는 죄목으로 마음에는 없는 상사의 비위를 맞추며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도 삼켜야 합니다.

 

정의에 분노하는 젊은이들을 감싸 안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고개 끄덕이다가 고래 싸움에 내 작은 새우 등 터질까 염려하여

목소리 낮추고 움츠리며 사는
고개 숙인 40대 남자입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집에서는 직장 일을 걱정하고 직장에서는 가족 일을 염려하며

어느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엉거주춤, 어정쩡, 유야무야한 모습.


마이너스 통장은 한계로 치닫고 월급날은 저 만큼 먼데
돈 쓸 곳은 늘어만 갑니다.


포장마차 속에서 한 잔 술을 걸치다가

뒤 호주머니 카드 만 많은 지갑 속의 없는 돈을 헤아리는

내 모습을 봅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가장이 아닌 남편,
나는 어깨 무거운 아빠,

나는 어머님의 불효자식,
나는 고개 숙인 40대 직장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껴안을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어도,
그들이 있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그들이 없으면 나는 더욱 불행해질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나의 행복입니다.

 

나는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나 일 때보다 더 행복할 줄 아는
40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