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오 하느님

2009년 2월 4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주님의 착한 종 2009. 2. 4. 11:24

2009년 2월 4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히브 12,4-7.11-15

형제 여러분,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14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또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하나라도 솟아나 혼란을 일으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복음 마르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어떤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본당 사목회의에서 글쎄 사목회장님께서 본당신부님을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고 해요. 사목회장님은 메모지를 하나 꺼내서 신부님의 열 가지 문제점이라고 하면서 하나하나 읽었었다고 합니다. 1번으로 뭐 잘못했고, 2번으로 뭐 잘못했다는 식으로 지적했던 것이지요.

사목회의는 찬물을 끼얹은 것같이 아주 냉랭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열 번째까지 다 읽은 뒤, “이렇게 잘못한 것은 빨리 고쳐야 하지 않겠습니까?”하면서 신부님을 바라보았지요. 그런데 그 열 가지 내용을 다 들으신 신부님께서는 일어서시며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읽은 그 내용은 틀렸습니다.”

일순간 긴장에 사로잡히게 되었지요. 틀렸다는 말이 뭐에요? 상대방의 말을 부정하는 것으로 서로 싸우자는 논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들 ‘이제 싸움이 시작하겠구나.’하면서 긴장했지요. 하지만 신부님의 다음 말이 모든 긴장을 일시에 풀어버렸습니다.

“저의 문제는 회장님이 기록한 그 열 가지만이 아닙니다. 회장님이 아직 저를 잘 모르셔서 그렇지 수백 가지 수천 가지도 더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면서 싸움은 끝나버렸습니다. 그게 아니라고 부인하다보면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더욱 더 커지면서 싸움이 끝이 없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스스로를 인정하는 말로써 부정적 감정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시기, 질투, 미움이 있지요. 개인, 가정, 교회와 사회 등등에 시기와 질투, 미움은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행복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불행으로 나아가게 만들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히면 나 외에는 다른 사람이 절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회당에서 가르치시지요.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차갑기만 하면, 예수님 행동 하나하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만 볼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점이 오히려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 등을 돌리게 되었지요.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기와 질투, 미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히려 고향에 큰 손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 행했던 엄청난 기적들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들은 믿음을 통해서만이 이해할 수 있는데,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시기, 질투, 미움이라는 쓸데없는 부정적 감정에 내 몸을 맡기는 고향 사람들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제1독서의 히브리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변화는 일으킬 수 있으며 예측도 가능하다. 변화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불필요하고 단조로운 삶의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게일 쉬)



힘내! 인경 씨!(유인경, ‘행복한 동행’ 중에서)

언제부턴가 딸아이는 어린 자식이 아니라 내 스승이자 최고의 치어리더가 됐다. 인터넷, 디지털카메라, 휴대전화 등 각종 신제품들의 사용법을 설명해 주고 최신 유행어나 재미있는 댓글을 알려줘 ‘꼴통 아줌마’란 소리를 면하게 해 준다.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난 딸아이는 언제나 내게 위안과 응원을 보내는 존재다.

몇 년 전인가, TV 주부 프로그램에 남편 사랑을 받기 위해 아홉 번이나 성형수술을 한 여성이 등장했다. 당시 패널이었던 나는 그 여성에게 “남편은 당신이 착해서 결혼했는데 착한 마음을 더 강조해야지 왜 성형수술로 사랑을 붙들러 하느냐.”란 얘기를 했다. 그런데 프로그램 게시판에 “넌 다섯 번이나 성형수술한 주제에 왜 성형한 여자를 나무라느냐.”란 댓글이 달렸다. 제왕절개 외엔 수술이라곤 받은 적이 없던 나는 억울해서 딸에게 “내 초등학생 시절 사진부터 쫙 올릴까, 아니면 나랑 닮은 이모 사진을 같이 올릴까?”라고 하소연했다. 그랬더니 딸이 이런 말을 했다.

“4천5백만 국민 중 겨우 한 명이 쓴 잘못된 댓글 갖고 뭘 그리 난리야. 그 사람인들 얼마나 고민했겠어? 세 군데라고 할까, 일곱 군데라고 할까 궁리하다 다섯 군데로 쓰면서 자기도 뜨끔했을 텐데... 만약 전 국민이 모두 엄마를 비난하고 오해해도 난 엄마를 믿고 사랑해. 내겐 제일 예쁜 엄마지만 또 내가 아는 가장 성실한 여성이기도 해. 친구들도 얼마나 나를 부러워하는데... 힘내! 인경씨!”

당시 중학생이던 딸아이의 위로와 응원 덕에 난 금방 행복해졌다. 물론 가족은 다른 이들이 총을 쏘면 대신 맞아줄 만큼 사랑하는 존재이긴 하지만, 어린 딸의 응원에 난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금방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선다. 새로운 과제 앞에 망설이면 딸은 “엄만 잘할 수 있어. 실수하면 어때?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긍정적인 사람이잖아.”라고 응원해 준다. 또 내가 아플 때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몸은 좀 어때? 아프지 마. 엄마 건강이 내 행복이야!’라는 딸의 문자 메시지는 녹용, 산삼 부럽지 않은 특효약이다. 딸이 대학생이 된 후에는 응원 메시지를 보낸 뒤 “쇼핑몰에서 봐 둔 코트가 있는데...”라거나 “이번 달은 행사가 많으니 용돈 인상 요망.”등의 요구를 해, 응원의 진정성이 의심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딸아이의 대책 없는 응원 덕에 난 오늘도 과로에 시달리고, 각종 욕을 먹으면서도 시시덕거리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