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오 하느님

사마리아 여인의 일기

주님의 착한 종 2007. 3. 14. 16:18
 

나는 여자다. 사람 축에도 못 끼는 여자다.

그것도 유다인들이 업신여기는 사마리아 여자다.

남자들은 내 젖가슴이 부풀어오르며 웬만큼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탐욕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였던 남자는 나를 제법 비싼 값에 다른 남자에게 팔았다.

나는 그의 재산이 되었다.

밤에는 정욕의 노예가 되어야했고 낮에는 등골이 휘도록 일을 해야했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란 나에게 있어서 허위에 불과했다.


나를 소유했던 남자가 내게 싫증을 느끼자 헐값에 나를 팔았고

나는 두 번째 남자에게서도 똑 같은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사랑하지 않는 여자에게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나는 팔렸고 또 팔려....  지금 살고있는 남자는 여섯 번째 남자다.

앞으로 몇 남자를 주인으로 모셔야 할 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 주인들은 결코 나의 주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물건 취급했고 나 또한 그렇게 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내 몸뚱이를 시궁창에 던지고 나니 두려울 게 없었다.


아직은 건강하고 여자로서의 몸도 쓸만하다.

아직도 가슴은 크고 몸은 제법 탄력이 있으며

매일 노동을 해야했음으로 허리며 배에 군살이 없다.

이것들이 병들고 시들면 끝이다.

그때까지는 그들이 때때로 나를 아쉬워하며 밤에 눈길을 피해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살 수 있다.

아 그러나 이것이 어찌 인생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날 한 낮. 늦잠을 잔 후 물동이를 이고 동구 밖 우물로 나갔다.

우리의 조상 야곱이 팠다는 우물이다.

그런데 그 우물가에 한 남자가 피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닌 유태인이었다.

검은 수염에는 먼지가 묻고 발등은 땀과 때로 얼룩져 있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윽한 눈길이었다.

유태인들은 우리를 개만도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절대로 사마리아 마을에 오지 않는다. 멀리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마 죄를 짓고 도망쳐 다니는 유태인이겠지....  혼자 짐작하며 두레박질을 시작했다.

 

"그 물을 좀 주오"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가 다시 나에게 말했다. "그 물을 내게 좀 주오"


남자가, 그것도 유태인 남자가 그토록 부드럽게 말하다니... 

남자는 언제나 내게 명령조로 말했다. 거리에서도 침대에서도 그랬다.

명령조의 말에만 익숙한 나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탁을 하다니...

나는 그에게 물을 주는 것도 잊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유태인 남자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입니다. 어찌 제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는 웃으며 "누구든 목이 마르면 물을 달라고 할 수 있지요"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신을 보니 당신이 나보다 목이 더 마르군요.

당신은 나에게 야곱의 물을 줄 수 있지만 나는 당신에게 끝없이 솟는 샘물을 줄 수 있다오"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군요. 이 우물은 깊고 또 당신은 두레박도 없는데 어디서 물을 길어

제게 주시겠단 건가요?  또 이 물은 야곱 할아버지가 만든 우물로 지금까지 한 번도 말라보지

않은 우물인데 당신은 이보다 더 좋은 우물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가 다시 말했다.

"그렇소. 이 물은 마셔도 잠시 후엔 또 목이 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을 거요. 당신의 가슴속에서 영원한 샘물로 솟아날 테니까요" 

 

그는 점점 더 모를 소리를 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닥없는 늪처럼 나의 온몸을 삼켰다.

이미 나는 등을 돌릴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선생님, 그 물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목이 말라 다시는 이곳에 힘들게 물을

기르러 나오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자 그는 내게 말했다.

"좋소. 그럼 당신의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


나는 당황했다. 이 젊은 나이에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데 그를 데리고 와야 하나..

그래서 남편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다섯 남자를 거쳐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지만 그 남자도 남편은 아니니

당신 말이 맞군요. 당신은 정말 목이 마른 여자요"


나는 깜짝 놀라 두레박을 놓치고 말았다. 두레박은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두레박을 놓아버리면 물을 마실 수가 없지 않소"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나는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이것이 내가 겨우 꺼낸 말이었다.

또한 내 스스로 무릎을 꿇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마을로 달려갔다.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으나 내과거를 모두 알고있는 유태인이라고 하자 모두 엉거주춤

나를 따라왔다


우물가에 다가갔을 때, 거기에는 열 사람쯤 되는 일행이 모여있었다.

모두 유태인이었고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한 사람을 둘러싸고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의 두 번째 남편 되는 엘르아젤이 흰 수염을 날리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그는 우리 마을의 원로였다. 젊은 시절을 방랑과 모험으로 보내고 이제는 고향에 돌아와

쉬고 있었으며 아는 것도 많았다.


"당신이 우리 마을 계집에게 물을 청한 사람이오?"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이 마을에 살고있는 저 아름다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한

목이 말랐던 사람이올시다"

그가 웃음을 머금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맞아요. 한 때는 영감님의 여인이기도 했지요"


엘르아젤의 얼굴 색이 달라졌다.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묻겠소. 우리는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당신네 유태인들은 꼭 예루살렘에서만 드려야 된다니 어찌된 거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아요. 예배 장소가 문제되는 그런 시절은 이제 지났습니다.

하느님은 바람 같은 분이라 어디든지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알아주고

사랑하시지요"

 

"그렇다면 선생님은 예루살렘이 아닌 데서도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엘르아젤이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분을 모셔라. 진정한 예언자이시다" 그리고 그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며 말했다.

"선생님 저희 마을에 가셔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그와 그의 일행은 이틀동안 우리 마을에 머물렀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들은 우리와 함께 먹고 잔 최후의 유태인들이었다.

나는 그가 나에게 은밀히 해준 말을 잊을 수 없다.


"어여쁜 여자여, 하느님의 딸이여,

사람들이 그대를 개처럼 안다고 그대 자신까지 자신을 개처럼 여겨서는 안 되오.

사람들이 그대를 물건처럼 취급하거든 그대는 그들을 천사처럼 받들구려.

사람은 남이 만들어주는 대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대로 정해지는 법이오.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봐요.

그대에게 한 방울의 자비를 바라는 목마른 사람이 있게 마련이니

이는 하느님이 언제나 그대 곁에서 목마르시기 때문이오.

사람이 짓는 죄 가운데서도 가장 고약한 죄는 자기를 버리는 것이오.

왜냐하면 자기를 버리면서 하느님을 같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엘르아젤을 비롯하여 나를 거쳐간 모든 남자들에게 말했다.

"여자와 아이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죄인을 추방해서는 안되고 거지들을 구박해서는 안됩니다.

그들과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여자와 아이처럼 미약한 존재이며

죄인이요 거지이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내 말을 들으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바야흐로 이루어졌소.

낡은 생활을 청산하고 새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의인과 악인, 남자와 여자, 유태인과 사마리아 사람을 나누는 벽을 부수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나가야 합니다.

나는 유태의 나자렛 예수이고 저 여자는 사마리아의 창녀요.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여인은 하느님의 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을 잡아야만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의 손을 잡았다.

"누이여, 목이 마르군. 물 한 그릇을 주오"


나자렛 사람 예수와 그의 일행은 바람처럼 머물렀다가 바람처럼 떠나갔다.

그러나 내 가슴엔 그가 남겨준 샘물이 끝없이 솟아났다.

나는 모든 남자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멸시의 눈길로 봤지만 나는 내 가슴속의 샘물로

그 따가운 눈총을 꺼버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뒤집어 쓴 죄목에는 사마리아인들과 먹고 마시며

그들을 사람 대접한 것도 들어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 꼭대기에 매달려 

 "내가 목마르다"

소리지르며 죽어갔다는 것이다.

 

남의 메마른 가슴에는 샘물을 파주면서 자신은 끝내 목말라 했던 사람.

그 하느님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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