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혼(人間)은 행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 인생은 짧고(욥 14, 5), 영원한 생명의 길은 좁으며(마태오 7, 14), 의인도 간신히 구원되고(1베도 4, 18), 세상의 사물들은 헛되고 기만적이며, 모든 것이 높이 있고 유수(流水)처럼 사라지고(2 열왕 14, 14), 시간은 불확실하고, 심판은 엄격하고, 말하기는 아주 쉽고, 구원되기는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또 한편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할 큰 빚, 당신을 위해서만 그를 창조하셨으니 그를 위해 한평생을 다 드려 복사(服事)해야할 의무를 알고, 그 생명을 또 당신만을 위해서 속죄하셨으니 그것 때문에 그 나머지를 다 돌려드려야 하고, 당신의 뜻에 대한 사랑의 보답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 밖에 천가지 은혜를 베푸셨으니 세상에 나기 전부터 하느님께 돌려야 할 의무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 생애의 대부분이 공연하게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안다. “하느님이 타오르는 등불을 손에 들고 예루살렘을 두루 살피실 때”(스바 1, 12) 처음으로부터 끝까지 받은 모든 은혜를 샅샅이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청산할 것을 요구하실 것이다. 때는 이미 늦어서 아마 ‘마지막 때’인지도 모른다(마태 20, 6). 이만큼의 해악과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서 그 중에도 영혼이 피조물들 안에 고의적으로 하느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하느님은 자기에게서 무척 멀어지시어 당신을 숨기시는 듯이 느껴지기 때문에 더 한층, 자기가 빠진 이렇게도 큰 파멸과 위험의 상태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공포에 떨며 슬픔이 치밀어 하루 한 시간도 유여치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모든 사업을 손털어 버리고, 이미 하느님의 사랑에 상처를 받고 속마음의 초조함과 비탄에 젖어 사랑하는 님을 부르기 시작하며 말한다.
제 一 노래
¿ Adónde te escondiste, 아! 어디에 그대는 숨어 계시나이까
Amado, y me dejaste con gemido? 사랑하는 님, 울음 속에 날 버려두시고
habiéndome herido; 상처만 나에게 남기신 채
Como el ciervo huiste, 사슴처럼 피해 가신 당신
salí tras ti clamando,y eras ido 당신 뒤따라 외치며 나왔더니 벌써 가셨네요!
>> 해 설 <<
2. 이 첫째 노래에 있어서 영혼은 하느님의 아들, 말씀이신 신랑의 사랑에 불타 분명하고 본질적인 뵈움을 통해 그와 일치되기를 갈망하며 사랑의 고민들을 제안한다. 더구나 그 사랑의 상처를 받아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들과 자기 자신에게서도 나왔는데 그 부재를 느끼니 아직도 그 사랑하는 님의 부재를 괴로워해야 하는 것을 꾸중하며 이제는 영원한5) 영광에 들어가 누리기 위해서 죽어질 육신에서 떠나가게 하시지 않으니 이렇게 말한다.
어디에 당신을 숨기시나이까?
¿Adondo te escondirte?
3. 이것은 마치 ‘말씀이시여, 나의 정배여, 당신이 숨어 계시는 곳을 나에게 가르쳐 주세요’하는 말과 같다.
이것으로 당신의 신적인 본질에 대해서 들어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이 숨어 계신 곳은 성 요한(1, 18)이 말하는 바와 같이 el seno del Padre 아버지의 품인데 이것은 신적 본질이요, 인간의 눈에 아주 온전히 이질적(異質的)이요, 인간적 모든 지성에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45, 15) 하느님과 이야기를 하며 “참으로 당신은 숨어 계신 하느님이십니다”라고 말을 한다. 그래서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아무리 친교가 대단하고 현존이 실감나고 하느님께 대한 지견이 높고 숭고하다 하더라도 한 영혼이 이 세상살이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아니오, 어떤 것과도 견줄 것이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아직도 실상 영혼에게 숨어 계시고 이러한 이유로 모든 만물들의 위대함 위에 숨어 계신다고 여기고 숨어서 찾아야 하는 것이 항상 마땅하다. 그래서 어디에 당신을 숨기신고? 말하며 찾아야 한다. 또 높은 친교도 감각적인 현존도 그 은혜로운 현존의 확실한 증거가 아니요, 메마름도 이 모든 것이 영혼 안에 결함 됨도 영혼 안에 하느님이 부재함에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 욥은(9, 11) “나에게 오신다 해도 나는 그 분을 못 뵈올 것이요, 나에게서 떠나신다 해도 모를 것이다”고 한다.
4.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가령 한 영혼이 아무리 대단한 친교를 느끼고, 감정이나 영적인 지식을 느낀다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 하느님을 분명하고 본질적으로 소유하거나 뵈옵는 것이라고 납득할 것이 아니다. 또 아무리 깊이 이런 것을 느끼더라도 그것 때문에 자기는 하느님을 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있다던가, 또 하느님 안에 보다 깊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만일 감각적이고 영적인 이 모든 친교가 없어져 메마름 속에 있다 하더라도 암흑과 저버려진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이것 때문에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사실 첫째의 경우 하느님의 은혜 중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보증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둘째의 경우에도 하느님의 은혜밖에 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은(집회 9, 1) “하느님 앞에서 아무도 자기가 사랑에 마땅한지 미움에 마땅한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구절에 있어서 영혼의 주요한 지향은 애정적이요, 감정적인 신심을 청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신랑의 소유에 대한 확실성도 명료함도 없으니 주요(主要)하게 그 본질, 분명한 현존과 뵈움을 청하여 저승에 있어서 확실하고 만족하게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5. 이것이 또한 아가(雅歌)에서 신부가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신랑인 말씀의 신성과 일치되기를 소원하여 “정오에 어디에서 양떼를 치고 계시는지, 대낮엔 어디에서 쉬게 하시는지 제발 알려 주셔요”하면서 아버지에게 그 일치를 청한 것이다. 어디서 쉬시는지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그 아들, 신적 말씀을 그에게 보여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당신의 유일한 아들 안에서가 아니고는 쉬시지를 아니하시므로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디서 쉬고 계시는지 그 장소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것도 그와 똑같은 질문인데 아들만이 아버지의 향락이기 때문이요, 아버지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가 아니고는 다른 곳에서 쉬시지 않으시고 아들 안에 아버지는 온전히 쉬시는데 당신의 본질 전체를 대낮에 즉 영원히 친교 하시고 쉬신다. 이 영원 속에 항상 그를 낳으시고 아들은 낳아지는 것이다.
이 음식, 즉 신랑이신 말씀의 음식은 아버지께서 무한한 영광 중에 취하시므로 꽃 짙은 이 품 안이요, 그 안에 사랑의 무한한 진미와 더불어 쉬시는 곳이요, 인생의 모든 눈에서와 모든 피조물들의 눈에는 숨겨져 있기 때문에 정배인 영혼은 “어디에 당신을 숨기셨어요?”(¿Adónde te es-condiste?)말하며 알려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6. 그러면 이제 이 목말라하는 영혼이 자기의 신랑을 만나게 되고 이 세상에서 가능한대로 그와 사랑의 일치로 결합되고,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그 한 방울의 물로 갈증을 풀기 위해서 자기 신랑에게 그것을 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손을 잡고 그가 확실히 숨어 계신 곳을 더 확실하게 가르쳐 주며 대답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이 세상에서 가능한 대로 완전하고 감미롭게 아주 확실하게 만나게 될 것이며, 다른 동료들의 지나간 발자취를 공연히 따라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다. 하느님의 아들인 말씀은 아버지와 성령과 더불어 함께 본질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영혼의 친밀한 존재 안에 숨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en el íntimo ser del alma)
그 분을 만나야만 할 영혼은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자기 자신 안에 지극한 잠심 중에 들어가고 애정과 의지를 따라오는 모든 것에서 나오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띠노는「독백록 Soliloquios」에서 “주님, 나는 당신이 안에 계시는데 당신을 밖에서 잘못 찾았기 때문에 당신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고 말한다. 진정 하느님은 영혼 안에 숨어 있으니 그는 사랑과 더불어 좋은 관상 인으로서 “어디에 당신을 숨기신고”하고 찾아야 한다.
7. 오! 모든 만물들 중에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이기에 그렇게도 찾고 그와 너를 결합하기 위해서 너의 사랑하는 님이 계신 곳을 알고자 하겠는가! 그런데 벌써 너 자신이 그대가 살고 계시는 곳, 그 분이 숨어 계시는 작은 방, 숨어 있는 집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너의 모든 보물과 모든 희망이 너에게 그렇게도 가까이 있고 네 안에 있다는 것, 아니 더 잘 말하자면 너는 그 분 없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앎이 너에게는 얼마나 큰 만족이요, 기쁨이겠느냐!
보라, 신랑이 말씀하신다(루가 17, 21).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들 안에 있다”고. 그리고 그 충복 성 바울로 사도는(2고린 6, 16) “너희들이 하느님의 전당이다”고 말한다.
8. 하느님께서 절대로 영혼에게서 떠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듣는 것(entender que nunca Dios falta del alma)은 영혼을 위해서 커다란 기쁨이다(Grande contento). 설령 대죄 중에 있을 때라도 은총 지위에 있을 때 못지 않게 함께 계신다.
아, 영혼아! 너는 무엇을 더 원하고 무엇을 더 너의 밖에서 찾겠는가? 너의 내부에 너의 재보들을 소유하고 있고 너의 향락과 만족과 풍부함과 너의 나라, 사랑, 하느님을 차지하고 있는데 네 영혼이 누구를 더 원하고 찾고 있겠는가? 그와 더불어 너의 내적인 잠심 안에 기뻐하고 용약 하라. 그렇게도 가까이 너는 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가? 거기서 님을 탐내고 거기서 님을 흠숭하고 더 이상 너 밖에 돌아다니면서 찾지를 말라. 네 안에서만큼 그렇게 더 가깝지도 않고 더 빠르지도 않고, 더 확실하게 즐기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할 것이며, 너를 산란하게 하고 피로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설령 네 안에 있다고 하여도 숨어 계시다는 것을 알아들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확실하게 찾기 위해서 숨어 계신 장소를 아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너도, 여기서 영혼아, 네가 사랑의 애정과 더불어 “어디에 당신이 숨어 계시나이까?”하고 청할 때 찾는 바로 그것이다.
9. 그런데도 또 너는 질문하여 “내 영혼이 사랑하는 님을 내 안에 두고 있는데 어째서 나는 그를 만나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느냐?”고 할 것이다. 그 원인은 숨어 계시기 때문인데 님을 만나고 님을 느끼기 위해서는 너도 숨어야 되는 것이다. 실상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야 할 사람이 그 숨어 있는 곳에까지 감추어지지 않고는 못 찾아내는 것인데, 그것을 만날 때에는 그도 숨겨져 있는 것처럼 감추어져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너의 사랑하는 신랑이 네 영혼의 밭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이시니 이 감추어진 보화를 위해서 지혜로운 상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칠 것이다(마태 13, 44). 이와 마찬가지로 네가 사랑하는 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너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모든 피조물을 멀리하고 영의 내적 잠심 안에 숨어(마태 6, 6) 문을 잠그고 말하자면 너의 의지를 모든 것에서 떠나게 하고 숨어서 너의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래서 님과 숨어 있으면 그 때에 숨어 있는 가운데 님을 네가 느끼게 될 것이고 님을 네가 사랑하게 될 것이요, 숨어서 님을 즐기게 될 것이며 님과 함께 숨어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언어와 감각을 초월하는 모든 것 위에 누리게 될 것이다. (sobre todo lo que alcanza la lengua y sentido)
10. 아, 진정 아름다운 영혼이여! 너의 품 안에 네가 소원하여 사랑하는 님이 숨어 계신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으니 그 분과 함께 잘 숨어 있도록 노력하면 너의 가슴 안에 님을 포옹하고 사랑의 애정과 더불어 님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보라, 이 숨어 있을 곳으로 님이 너를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부르신다(26, 20). 자, 너의 집안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아 잠그라. 말하자면 너의 모든 능력들을 모든 만물들에게서 떠나 한 순간 동안 숨어라. 즉 현세의 삶이 잠깐이라는 말이다. 만일에 이 인생의 잠깐 동안 슬기로운 사람이 말하듯이 너의 마음을 힘써 지킨다면(잠언 4, 23) 오, 영혼아! 하느님은 의심 없이 역시 이사야에 의해서 말씀하신 것을 너에게 꼭 주시리라 “나는 너에게 감추어진 보물들을 주겠노라. 너에게 비밀의 실체와 신비를 밝혀 드러내겠노라”(이사야 45, 3). 이 비밀의 실체란 하느님 자신이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신앙의 실체이며 그 개념이기 때문이고 신앙은 비밀이요, 신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간적인 삶 안에서는 영혼이 저승에서처럼 그런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 순결하게 되지는 못할지언정 모세처럼 숨는다 해도 바위의 동굴에 숨게 되는 것인데(출애굽 33, 22-23) 이것이야말로 진정 하느님 아들의 생애에 완전한 모방인 것이다. 그래서 영혼의 신랑이신 하느님의 아들은 그 오른팔로 하느님의 보호 아래 두시어 하느님의 어깨를 그에게 보여주실 것인데 이것은 이 세상에 있어서도 그 신랑이신 하느님 아들의 사랑을 통해서 일치되고 변화되는 그런 완덕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마나 그와 결합된 것을 느끼고 어찌나 그 신비들을 잘 알게 되고 지혜롭게 되었는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인식하는 데에 관여하여는 “어디에 당신이 숨어 계시느냐?”고 말할 필요가 없어질 만큼 되는 것이다.
11. 아, 영혼이여! 신랑을 만나기 위해서 너의 숨을 집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주 마땅하다고 말을 하였다. 그렇지만 만일에 또다시 그 말씀을 들어보고 싶다면 접근할 수 없는 진리와 실체로 가득한 한마디 말씀을 들어보아라. 이것은 믿음(信仰) 안에 찾는 것이며, 사랑 안에 찾는 것이다. 무엇엔가 만족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맛보려고 하지도 않고 네가 알아야 할 것 이상으로 더 알려고 하지도 말고 믿음과 사랑 안에 님을 찾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맹인의 앞잡이들이어서 네가 모르는 곳을 통해서 너를 인도하여 하느님의 숨어 계신 곳까지 이끌고 갈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비밀이라고 우리가 말한 바 영혼이 하느님께로 가는 발이요, 사랑은 영혼을 걸어가게 하는 안내자이다. 그리고 영혼이 걸어가며 이야기하고 이 신비들과 신앙의 비밀들을 농락하며(manoseando) 신앙이 그 안에 내포하는 것을 사랑이 발견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영혼이 소원하는 신랑(Esposo)이시다. 이 세상에서 특별한 은혜로 하느님과의 신적일치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미 언급한 바 있는데 저승에서는 본질적인 영광을 통해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고 님을 즐기며 그때에는 이미 아무 것도 감추어져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이 세상에서 도달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인 그 일치의 신분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영혼에게는 신랑이 아버지의 품 안에 숨어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은데 이것을 저승에서 누리고 싶어서 “당신은 어디에 숨어 계시나요?”하고 항상 말하는 것이다.
12. 아, 영혼아! 항상 하느님을 숨어 계신 분으로서 찾음은 아주 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너는 하느님께 무척 크게 영광을 돌리고 있으며, 네가 달성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도 더 높이 또 더 깊이 떠받들고 있으므로 훨씬 더 잘 달성할 것이다. 그러니 만큼 너의 능력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머뭇거리지 마라. 말하자면 절대로 네가 하느님에 대해서 못 알아듣는 것을 만족하라.
그래서 네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듣거나 느끼는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그에 대해서 알아듣지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을 기뻐하고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믿음 안에 찾는 것이다(buscarle en fe).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접근할 수도 없고 숨어 계시기 때문인데 네가 아무리 더 만나는 것 같고 느끼는 것 같고 하느님을 알아듣는 것 같다고 하더라도 항상 하느님을 숨어 계신 분으로 모실 것이며 숨어서 숨어 계신 분으로 너는 하느님을 섬길 것이다. 그래서 너는 그 수많은 슬기롭지 못한 사람들처럼 하느님을 저열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 분을 알아듣고 맛보고 느낄 때에는 하느님이 더 멀리 계시고 더욱 숨어 계시다는 것을 알아들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더 진실하니 분명하게 하느님을 알아듣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만큼 더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니 예언자 다위이 말하듯 “당신의 숨으실 곳을 암흑 속에 두셨다.”(시편 17, 12)고 하신 바와 같다. 그래서 그 가까이에 도달하면서 강력히 네 눈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암흑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역경에 있어서나 순경에 있어서나 영적이나 물질적인 번성기에 있어서나 하느님을 숨어 계신 분으로 모신다는 것은 아주 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에게 고함쳐 어디에 숨어 계시느냐고 부르짖을 것이다.
사랑하는 님아, 울음 속에 날 버려두시고
Amado, y me dejaste con gemido?
13. 자기 청(請)에 더 감동하게 하고 그가 더욱 기울어지게 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님(Amado)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이 사랑을 받으실 때에는 당신이 사랑하는 이의 청구에 아주 쾌히 응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성 요한을 통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15, 17) “만일에 너희들이 내 안에 머문다면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청하는 대로 다 이루어 질 것이다.” 그리하여 영혼이 온전히 그와 함께 있을 때에 그 마음이 하느님밖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애착이 되어 있지 않으므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님이라고 하느님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어느 때나 그 생각을 그에게 두게 된다. 만약에 이런 점에 부족함이 있다면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듯이(판관 16, 15) 어떻게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겠는가? 그 영혼이 그녀와 함께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말했겠는가? 여기서 용기란 생각과 애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신랑이라고 부르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이 온전히 그와 함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청원은 하느님의 현존에 별 가치가 없으니 하느님이 그 청원을 당장에 들어주시지 않으시고 기도를 계속함으로써 그 영혼이 더 계속적으로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되고 그 마음이 사랑의 애정과 더불어 더 온전히 그와 함께 있게 되기까지는 들어주시지 않으시는 것이다. 진정 사랑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하느님에게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그 다음에 말하는 “나를 울음 속에 버려 두셨다”고 말하는데 있어서는 사랑하는 님의 부재가 사랑하는 이 안에 계속적 탄식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주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 밖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 데에도 즐거움이 없고 아무런 쉼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이것으로 알게 되는데 참으로 그에게 만족되는 것이 아니고는 여하한 것과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6) 그러나 만족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온 세상을 모두 다 소유한다 하더라도 만족되지 않을 것이요, 오히려 더 많이 차지하게 되면 차지하게 될수록 그만큼 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의 만족이란 사물들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서 적나라하게 벗어버리는 데에 있는 것이며, 영의 청빈(pobreza de espíritu)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융합되고 특별한 은혜와 더불어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는 사랑의 완덕 안에 있기 위해서 영혼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이 삶에 달성되었을 때에 약간의 만족과 더불어 비록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다위는 그 모든 완덕과 더불어 천국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당신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나를 충만하게 할 것이다.”(시편 16, 15)라고 희망하였다.
그러므로 평화와 태평함과 마음의 만족, 이 세상에서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그에게 충분하지 않아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는 탄식을 떼어버리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설령 평화스럽고, 괴롭지 않다 하더라도 부족한 것에 대한 희망 안에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탄식이란 희망 안에는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가(로마서 8, 23) 말하는 바와 같이 비록 완전하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았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탄식이란 다름이 아니라 영혼이 자기 안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상처를 내는 곳에 상처의 탄식이 있는 것이요, 그 부재의 느낌 안에 항상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랑의 그 감미롭고 맛있는 친교를 조금 맛보았을 때 한층 더 그러한 것이어서 자리를 비우고 갑자기 메마르고 외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즉시 말하여
당신은 사슴 마냥 피해 가셨다.
Como el ciervo huiste.
고 한다.
15.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가(雅歌)에(2, 9) 신부는 신랑을 사슴과 산양에 비교하는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님은 노루 같이 날랜 사슴들과 같다”고 한다. 또 이것은 사슴처럼 이상하며 고독하고 동반자들을 피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숨기에 재빠르고 나타나기도 빠르기 때문인데 이것은 신심 있는 영혼을 방문하듯이 선물을 주고 용기를 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이탈과 부재에 있어서 그들을 시험하고 겸손하게 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이러한 방문들 다음에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따라오는 것을 이제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적절한 고통을 더욱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처만 나에게 남기신 채
habiéndome herido.
16. 이것은 즉 당신의 부재로 말미암아 보통으로 겪는 고통과 고민으로는 나에게 충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신의 화살로 한층 더 치열하게 나를 상처 나게 하고 당신을 뵈옵고자 하는 정열과 욕구를 불러일으키시도록 사슴처럼 살짝 가벼이 피하시어 조금도 당신을 붙들게 두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17. 이 구절의 의미를 더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야 한다. 즉, 하느님이 영혼을 사랑의 상처를 받게 하고 사랑에 있어서 보다 높이 들어올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다른 양식으로 방문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불타는 듯한 사랑의 접촉을 하시는 것이 보통인데 불화살처럼 상처를 내고 영혼을 꿰뚫으며 사랑의 불로 온전히 타버리게 두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아주 적절히 사랑의 상처라고 부르는 것이며(heridas de amor), 이에 대해서 영혼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7) 이와 같은 상처는 어찌나 의지를 애정 안에 불사르는지, 영혼은 사랑의 불과 불꽃에 불살라져 있는 것이다. 어찌나 불타는지 그 불꽃 속에 완전히 타버리는 것이며 영혼을 자기 밖으로 나가게 하며 전체를 다 갱신하고 존재의 새로운 양식에 지나가는 것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불사조(不死鳥)와 마찬가지로 다 타서 새로 나는 듯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위는 말하기를 “내 마음을 불살라 허리는 변동하였어도 나는 미련해서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시편 72, 21-22)
18. 예언자가 여기서 허리라고 이해하는 욕구와 애정은 모두 다 마음이 이와 같이 타오를 때에 감동되어 신적으로 변화된다. 그리고 영혼은 사랑으로 인해 무(無)로 되어버려 사랑밖에는 아무 것도 모르게 된다. 이때 콩팥이란 욕구와 애정의 변화는 대단한 것이어서 하느님을 뵈옵고자하는 갈망과 고통이 어찌나 심한지 사랑이 자기에게 참기 어려운 엄격함을 사용하고 있는 듯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처는 오히려 건강을 위한 것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상처를 낸 것이 아니라 사랑이 이렇게 영혼을 괴롭게 두시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전한 사랑의 생명에 그와 만나 뵈옵고 일치되기 위해서 죽여버려 더 용감하게 영혼을 상처 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만큼 영혼은 자기의 고통을 소중히 여기고 선언하며 “나에게 상처를 내었다.”(habiéndome herido)고 하는 것이다. 즉, 이렇게 나를 상처 내시어 당신의 사랑으로 상처를 받아 죽으며 사슴처럼 그렇게도 가벼이 숨으셨다고 하는 것이다.
19. 이 느낌은 이렇게 크게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영혼에게 이루시는 사랑의 그 상처 안에 그 접촉을 느끼는 사랑하는 님을 소유함이 어찌나 신속한지 의지의 애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속함 자체가 부재를 느끼게 하고 여기서 소원하는 대로 소유할 수 없는 것이 그 부재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 즉시로 그와 같은 부재의 탄식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뵈움은 치유하기 위해서 보다는 더 상처를 내기 위해서이며,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보다는 더 비통하게 하기 위해서만 이러한 상처를 내시기 때문에 하느님이 영혼을 쉬게 하고 만족하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지견(認識)을 더 신랄하게 하고 욕구를 증가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하느님을 뵈옵고자 하는 고통과 소망이다.
이러한 것들을 사랑의 영적인 상처들이라고 부른다. 이 상처들은 영혼에게 지극히 감미롭고 갈망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영혼은 이러한 화살들로 천가지 죽음으로 항상 죽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을 자신에게서 나오게 하고 하느님 안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다음 시구(詩句)를 알아듣게 하는 것이다.
당신 뒤따라 외치며 나왔더니 벌써 가셨군요.
salí tras ti clamando, y eras ido
20. 사랑의 상처에는 상처를 낸 편밖에는 약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상처를 받은 영혼은 그에게 상처를 낸 자기의 사랑하는 님의 뒤를 따라 상처를 낸 분의 힘 속에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 그에게 소리 지르며 나온 것이다.
이 탈출(salí)이란 여기서 영적으로 하느님 뒤따라가기 위해서 두 가지 양식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가지는 만물 모든 것에서 나오는 데에 있는 것인데 그 모든 것들을 싫어하고 경멸하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자신을 잊음으로써 자기자신에서 나옴으로 되는 것인데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더불어 영혼을 만지면 일어나게 되어 자신의 망각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게 할 뿐 아니라 본성적인 습관들과 경향들에서까지 하느님을 부르짖으며 나오게 하신다. 그래서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나의 정배시여, 당신의 어떠한 접촉과 사랑의 상처로 내 영혼을 빼내셨나이까? 모든 만물에서 나를 나오게 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서까지 빼내시고 나오게 하셨나이까? (왜냐하면 진정 육체에서까지 영혼을 빼내시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 영혼을 당신에게로 일으키시고 당신에게 소리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것에서 이탈되어 당신과 일치하기 위해서 입니다.
21. “이미 당신은 가셨군요.” 이것은 말하자면 내가 당신을 붙드는 줄 알았을 때, 당신의 현존을 알아듣는 줄 알았을 때에 나는 당신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당신 편에서나 나의 편에 의지할 곳 없이 사랑의 폭풍 속에 매달려 괴로워하고 있단 말이다.
여기서 영혼이 사랑하는 님을 따라 나온다고 하는 것은 아가의 신부가 일어난다는 표현으로 부른다(levantar). “일어나 온 성을 돌아다니며, 이 거리 저 장터에서 사랑하는 님 찾으리라, 마음먹고 찾아 헤맸으니 찾지 못하였네… 하며 나에게 상처를 내었다”(아가 3, 2 : 5, 7)한다. 신부가 여기서 말하는 일어난다는 이 행동은 영적으로 거기서 이렇게 이해되는 것이다. ‘낮은데서 높은 곳으로’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혼이 나간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자기의 낮은 사랑과 양식에서 하느님의 높은 사랑에로’라고 하는 의미이다. 아가의 신부는 신랑을 만나지 못해서 상처를 받았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여기서도 ‘영혼이 사랑의 상처를 받았다’고 하며 이렇게 버려 두었다고 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영혼은 사랑의 대상이 부재함으로 원인 하는 계속적인 고민 속에 살게 되기 때문이다. 영혼은 사랑하는 님에게 완전히 내맡겼으니 그도 자기에게 내어주기를 기다리지만 헛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 사랑하는 님의 내어주심인데 아직도 내어 주시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님을 위해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다 잃어 버렸는데 자기의 상실한 보람을 못 만났다고 하는 것은 그 영혼이 사랑하는 님의 소유가 결함 되어 있기 때문이다.
22. 완덕의 신분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고통과 고민이 하느님의 부재에서 원인 하였으니 이 신적인 상처가 일어나는 때에 보통으로 어찌나 격렬한지 만일 주님이 그 고통을 부축하시지 않으신다면 죽을 것이다. 그들 의지의 입맛은 건전하고 그 정신은 순결하며 하느님을 위해서 준비를 다 갖추고 있는가 하면 우리가 이미 말한 접촉 안에 무엇보다도 더 갈망하는 신적인 사랑의 감미를 무엇인가 맛보게 하셨기 때문에 그 고통이란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약간의 틈을 통해서 무량한 선을 엿보게 하는데 그것을 누리게 하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통, 형언할 수 없는 고민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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