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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4월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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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현관문을 여는 순간
신비한 짙은 꽃 향기가 피어 오르듯
후각을 자극합니다.
몇 년 만인가요?
정말 오랜만에 거실의 행운목이
꽃을 피웠습니다.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 때부터
함께 살았던 나무이니
만만치 않은 나이의 행운목입니다.
올해는 우리 집에 행운이 찾아올까요?
사순기간에 향기를 피워주고 있으니
행운은 벌써 찾아 온 것이겠지요?
오늘은 제1독서부터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예레미야 20,10-13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반드시 복수해 주시리라 확신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벌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로 미루어 보아,
예레미야는 그의 행동에 꼬투리를 잡거나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술수를 꾀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임이 확실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자들의 음모를
잘 알고 있었기에
하느님께 그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레미야의 청원은
하느님께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 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공동체적인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백성에게 박해받는 예레미야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네요.
예수님께서는 예레미야처럼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저주하고 배척하며
벌을 내려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지 않으셨다는 것
다들 잘 알고 게시죠?
유다인들은 돌을 던져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사실은 섬긴 것이 ‘아닌’ 결과가 되었습니다.
메시아의 출현을 노래했지만,
정작 오시니까 ‘거짓 예언자’라고 합니다.
성경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메시아를
고집하고 있었던 것일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모르기에 돌을 던졌을까요?
아닙니다. 아닐 것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기에 돌을 던졌습니다.
그들의 무지는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초래합니다.
종교 때문에 살인을 기획했다면 광신입니다.
미친 믿음이지요.
자신들은 의로움을 내세우지만,
진실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이려 들면
상대도 나를 죽이려 듭니다.
내가 남의 종교를 비난하면,
그들도 내 종교를 비난합니다.
신앙이 아니라고 우기면,
결과 역시 마찬가지로 돌아옵니다.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된 현실입니다.
타인의 종교에도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아닌 듯이’ 보이더라도
기본 예의는 갖춰야 합니다.
종교를 떠나 해석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문화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무시하려 드는 것은
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유럽 종교가 얼마나 우수한 문화를
말살시켰는지 역사는 알고 있습니다.
타 종교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꼈다면
이제는 꼭 벗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예수님께 돌을 던지는
유다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 요한 10,31-42는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시며
그들을 하느님께 봉헌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이
가슴 깊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오늘 김창용 세례자 요한 형제께서
보내주신 동영상입니다.
영화 벤허를 배경으로 하고 있네요.
함께 노래를 부르며
오늘 사순 제5주간 금요일을 보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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