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abel of Portugal with St Elizabeth- CHRISTUS, Petrus
1457-60 Oak panel, 59 x 33 cm Groeninge Museum, Bruges
축일: 7월 4일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Sant' Elisabetta di Portogallo Regina
Sta. Elisabeth Portugaliae, Vid
Saint Elizabeth of Portugal
(The Peacemaker; Isabel of Portugal; Isabella of Portugal)
Born:1271 at Aragon, Spain
Died :4 July 1336 at Estremoz of fever; buried at Coimbra;
miracles reported at her tomb
Canonized:24 June 1625 by Pope Urban VIII
Third Order Franciscan ’화해의 성녀’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로 구라파에 널리 알려진
루시타니아의 성녀 엘리사벳(1271-1336년)은
아라곤 3세 국왕의 딸로 태어나 자기의 증조모이신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재속프란치스코회 주보성녀)을 따라 이름지었다.
1271년 그녀가 태어났을 때,
뒷날 아라곤의 왕이 될 아버지 페드로 2세는
그 당시 군주인 자기 아버지 야고보 1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이것은 장차 일어날 일의 징조였다.
그녀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빠른 속도로 영적 감식력을 습득해 나갔다.
아직 소녀 시절인 12살 때에 포르투갈의 왕 데니스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지만,
데니스는 강력한 통치자였으나 남편으로서는 칭찬 받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기도와 자선사업 등을 운영함으로써 모든 난관을 극복하려고 했으며
또한 성공한 경우에 속한다.
그녀는 매일 미사를 포함한 신앙 생활뿐 아니라
자기의 도움을 받으러 찾아 온 모든 사람들,
즉 순례자, 외국인, 병자, 가난한 이들을 돕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자선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향한 사랑의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생활 형태를 스스로 영위할 수 있었다.
남편에게도 변함없이 헌신적이었던 그녀에 대한 남편의 배신 행위는 왕국의 수치였다.
왕은 그녀의 평화적 노력을 몹시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위해 하느님께 용서를 간구했고,
마침내 남편은 죄많은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사생아를 더 총애한다고 생각하는
반항적인 아들 알퐁소와 남편을 화해시켰다.
그녀는 아라곤 왕인 페르디난도와
왕위를 주장하는 그이 사촌 야고보와의 싸움에서도 평화 중재인 역할을 하였다.
엘리사벳은 1325년에 남편과 사별하고 코임브라의 집으로 은거하였는데,
이곳은 자신이 세운 글라라회 수녀원이 있었지만, 수녀가 되려는 이상을 포기하고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서 엄격한 보속생활과 봉사활동을 펼침으로써
그녀의 명성이 사방으로 펴졌던 것이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당시 포르투갈의 왕이 자기 아들 알퐁소와 알퐁소의 양자 캐스틸의 왕사이의
영구적 평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마침내 그 일을 성취하게 되었다.
평화를 도모하는 일이 결코 조용하고 침착한 노력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극이 너무 지나쳐 서로를 파괴하려는 감정을 가진 사람들 사이를 조정하는 것으로
즉 결백하고, 끈기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것은 일찍이 14세기 초반에 있었던 한 여인의 진실된 것 모두이다.
엘리사벳은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오직 하느님과 인류에 대한 성실한 사랑과 동정심을 지녔던 것이다.
엘리사벳의 건강은, 화해를 위해서 여행에 나설 만큼 좋은 상태에 있지 않았다.
숨막힐 듯한 더위는 상황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여행을 단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전쟁의 비참함과 파괴를 막기 위해
바치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은 없다고 말했다.
그녀가 성공적으로 평화를 지켜 나가는 동안
그녀의 건강은 죽음이 임박할 정도로 중태에 빠졌다.
1336년 성녀는 포르투갈의 에스트레모스에서 운명하였으며
유해는 코임브라 수녀원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축일이 원래 7월 4일이었으나,
1965년 인노첸스 12세 교황에 의하여 7월 8일로 옮겨졌었으나 다시 7월 4일로 지내고있다.
엘리사벳은 흔히 한 마리 비둘기,또는 올리브 가지가 그려진 왕복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1626년에 시성되어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포르투갈의 황후 엘리사벳은 한마디로 말하면 ’화해의 성녀’이다.
포르투칼은 현재는 당당한 공화국이지만, 옛날에는 일개의 왕국이었고,
지금 말하려는 성녀 엘리사벳은 그 왕후 중의 한분이었으며,
그녀는 포르투칼을 위해 대단히 명예스러운 존재였다.
그녀는 1271년 그페인의 아라곤왕 베드로 3세와 시칠리아의 왕녀로서
그의 왕비가 된 콘스탄시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투란지아(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의 생질에 해당하는 그녀를
아버지는 자기 딸도 그 성녀의 높은 덕을 본받도록 그 이름을 엘리사벳이라 지었다.
그 당시 엘리사벳의 조부는 그의 장자인 베드로와 전쟁 중이었으나
엘리사벳으로 인해 서로 화평을 맺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 조부는 어린 왕녀의 교육을 자진해서 맡게 되었다.
조부가 별세한 후 그녀는 불과 8세의 어린 몸이었지만
당시 풍속에 의해 포르투칼의 왕 디오니시오와 약혼을 하게 되어
궁중생활을 배우기 위해 리스본 시로 가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이 될 국왕은 그리 덕망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 왕후는 그를 잘 섬기고 그의 환심을 얻도록 하는 한편,
영혼에 위험한 궁중의 호화찬란한 생활을 가급적 피해
자신을 위한 엄중한 생활을 요망했고,
그 고조모 성녀 엘리사벳(헝가리)을 본받아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는 동시에 그 규율을 엄수하며
자진하여 단식과 극기를 했다.
1288년 그녀에게 왕녀가 생겼다.
그 이름을 콘스탄시아라 하여 후에 카스티야의 왕비가 되었으나 1313년 별세했다.
1301년엔 왕자가 탄생했는데, 이는 후에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한 사람이다.
엘리사벳의 남편인 디오니시오 왕은 결코 그녀에게 시종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심중에 심각한 고통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일체를 하느님께 맡기고 인내하며 항상 부드러운 온정으로써 남편을 대했다.
그러는 동안 왕도 자기 아내의 마음을 알게 되어 감화한 나머지,
왕비로 하여금 자유로이 신심과 자선에 힘쓰도록 승낙했다.
왕비는 기쁜 마음으로 병자와 극빈자를 방문하고 그들을 구호하는 한편,
신심에 열중하고 기도를 많이 하며 사제와 같이 성무 일도를 바치고
매일같이 빵 세 조각과 물로써 연명했다.
이러한 감탄할만한 극기생활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되어
가끔 그녀를 통해 기적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어떤 눈먼 아이의 눈에 손을 댔더니 그 눈이 즉시 밝아지고,
어떤 환자에게 십자 성호를 그었을 때 그 환자가 즉시 완쾌되었다는 사실 등이다.
엘리사벳은 그녀의 신하인 귀족들에게도 타인애의 표양을 보여 주었다.
즉 그들, 특히 그녀의 친족이 되는 사람들이 서로 투쟁하며
심지어는 전쟁도 불사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마다
그녀는 동분서주하며 서로 화해의 길을 터 주었다.
어떤 때는 양군이 대진해 막 전쟁이 벌어지려 할 때
왕비가 홀로 뛰어나가 양편을 조정시키고
대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했다는 것이다.
1325년 남편인 디오니시오 왕이 서거하자
엘리사벳은 코닌프리첸시스에 있는 클라라 수도회에서
지금까지 국모로써 존경을 받던 그 몸에 수도복을 걸치고,
자신을 하나의 비천한 종으로 생각하며 완덕에 매진했다.
그녀의 본래의 희망은 일생을 수도원에서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수도 생활을 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의 권유도 있고,
또 아직까지는 그렇게 엄격한 수도 생활에 익숙치 않고 해서
가끔 궁전에 돌아가 궁전 일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일로 인해 극도로 피로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중병으로 병석에 눞는 몸이 되었다.
그녀는 병고를 잘 견디어 조금도 그 아픔을 타인에게 표시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의 며느리가 머리맡에 앉아 있을 때 그녀는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미안하지만 잠깐 일어나 거기 오시는 부인께 자리를 양보해 다오
.” “아무도 안 계신데 누구에게요?” 며느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엘리사벳은 “바로 거기 계시지 않니? 흰옷을 입으신 분이...”라고 대답했으나
그녀에게만 보이던 분은 바로 엘리사벳이 평소에 존경하던 성모 마리아로서,
그녀를 천국에 영접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
실제 그로부터 몇분도 지나기 전에 엘리사벳은
“은총의 어머니, 자애 깊으신 어머니 성 마리아여!
원수의 손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임종때에 저를 구하소서”하고
혼잣말로 속삭이고 나서 잠자듯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1625년, 교황 율리노 8세때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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