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오 하느님

성인 - 8월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주님의 착한 종 2019. 8. 14. 08:34


 

축일:8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San Massimiliano Maria Kolbe Sacerdote e martire

St. Maximilian Maria Kolbe

Saint Maximillian Kolbe

St. M. M. Colbe

(Sudunzska-Wola, Polonia, 8 gennaio 1894 - Auschwitz, 14 agosto 1941 )
Born : 7 January 1894 at Zdunska Wola, Poland as Raymond Kolbe

Died : 14 August 1941 by lethal carbonic acid injection

after three weeks of starvation and dehydration at Auschwitz; 

body burned in the ovens and ashes scattered

Beatified : 17 October 1971 by Pope Paul VI;

his beatification miracles include 
the July 1948 cure of intestinal tuberculosis of Angela Testoni, 
and August 1950 cure of calcification of the arteries/sclerosis

of Francis Ranier

Canonized : 10 October 1982 by Pope John Paul II;

declared a martyr of charity

Massimiliano = composto di Massimo e Emiliano (dal latino)

 


1894 1 8일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라이몬드(Rajmund Kolbe)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1907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막시밀리안이란 이름을 얻었다.

 

1911년에 유기서원을 하였고,

1917년에는 로마에서 천주의 모친 동정 마리아께 대한

자녀다운 효성에 불타는 마음에서 "성모 기사회"라는 신심 단체를 설립하였다.

1918, 그는 로마에서 서품받고 폴란드로 귀향하여,

월간 "성모의 기사(Rycerz Niepokalanej)"를 창간하였다.

1927, 그는 와르소에서 25마일 거리가 되는 곳에

무염시태 성모의 마을을 세웠는데, 그는 선교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성모님의 보호와 도우심 밑에서 이와 비슷한 마을을 일본과 인도에도 세웠다.

1939년 나치에 반대한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일단 석방된 뒤,

1941 2월 유대인들과 폴란드 지하조직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당했다.

바르샤바 감옥에 갇힌 뒤 배에 실려 크라쿠프 교구 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이곳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죄수 프란치셰크 가요프니체크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놓았는데, 처음에는 굶주리다가 마지막에 페놀(석탄산) 주사를 맞고

1941 814일 죽었으며 화장되었다.

1971 10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포되어

나치 희생자들 가운데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시복(諡福)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982 10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사제이자 수도자로서

일생동안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 몸을 바쳐 실행하고 순교의 길을 간 성인이다.

폴란드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신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성모께 대한 특별한 사랑과

믿음을 간직하며 자라났다.

 

티없이 맑은 소년시절의 어느날 콜베 신부는 기도 중 성모님으로부터

순교의 관과 순결의 관을 선사 받게 되고

결국 그의 일생은 이 계시를 꾸준히 실현하며 펼쳐지게 된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받기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그는 타고난 재능을 닦을 수 있게 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로마에서 수학하며 철학과 신학의 박사학위를 얻게 된 그는

조국 폴란드로 돌아와 자신이 계획하던 주님의 나라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로마 유학시절 만들었던 "원죄 없으신 성모회"를 기초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성모의 기사회라는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의 도움은 커녕 주변의 비웃음과 냉담함을 이겨내며 콜베신부는

오직 기도와 고행으로 기적적인 발전을 이룩해 나간다.

이런 신부의 모습에 감동한 수련 지원자들이 몰려들어

그를 중심으로니에포칼라누프라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기리는

공동체가 탄생한다.

이곳에서 그들은 잡지 등의 홍보매체와 기적의 매달 제조로 전교에 매진한다.

 

이 공동체가 발전을 거듭하자 신부는 세계 곳곳에 이것을 전파하고

세계 각국어로 된성모의 기사를 발간하려는 포부를 안고

우선 일본으로 출발한다.

일본과 인도에서 선교하며 결실을 얻은 신부는

건강의 악화로 다시 귀국하게 되는데

마침내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 아우슈비츠 감옥에서

타인, 그것도 전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준 것이다.

죽음이란 보통의 죽음도 아닌 아사형이란 끔직한 것이었다.

 

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귀한 사랑,

예수님의 가르침을 콜베 신부는 그대로 실행한 것이다.

그의 숭고한 죽음은 지옥같은 아우슈비츠를

주님의 섭리가 지배하는 장소로 바꿔 주었으며

사랑으로 증오를 갚아주는 표양을 보였기에 언제까지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