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오 하느님

성인 - 10월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주님의 착한 종 2016. 10. 4. 08:23


축일:10월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St.FRANCIS of Assisi
San Francesco d’Assisi Patrono d’Italia
Assisi, 1182 - Assisi, la sera del 3 ottobre 1226
(1181 at Assisi, Umbria, Italy as Francis Bernardone
-4 October 1226 at Portiuncula, Italy)
Canonized:1228 by Pope Gregory IX



1181(l182?)년 아씨시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청년 시절의 가벼운 생활에서 마음을 돌이켜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가난을 포옹하고 복음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만민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파했다.

뜻을 같이 하는 형제들이 모여와 작은형제회가 시작되었다.
클라라 관상 수녀회와 재속회를 세우고 이교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했다.

성인으로부터 새로이 발견된 복음적 생활양식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수도 공동체로 발전되었다.
성인이 시작한 수도생활의 이 새로운 형태는 신앙적 기초 위에서

세상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교회에 가져왔고,
당시 교회의 교계제도를 거부하면서가지 성행하던 청빈운동에 바른길을 제시하였다.
1224년 라베르나 산에서 관상하던 중 주님의 거룩한 오상을 받아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그리스도 처럼되었다.
1226년 10월 3일 아씨시에서 세상을 떠났다.

2 년 후인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유해는 성 프란치스코.대성전에 있다.




St. Francis in Ecstasy-CARAVAGGIO.
c.1595. Oil on canvas,92,5 x 128,4 cm.Wadsworth Atheneum, Hartford, Connecticut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를 놀라게 하고 교회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작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는 복음을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모든 것을 기쁘게,
아무런 제한이나 한 조각의 자존심 따위도 없이 실천함으로써 모든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시시의 부요했던 포목상 베드로 벨라도네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1182-1226년)는
그의 어머니 비카 부인이 요한으로 세례(9월 26일 성루피노성당에서 세례자요한)를 받게 했으나,
프랑스를 사랑하던 부친이 프랑스인이란 뜻으로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시대는 화폐 경제체제로 발전되어가는 과정에
귀족과 시민자치단체가 대립하고 전쟁과 사회 변혁의 시대적 종교적으로

혼란스러운, 가치 혼란의 시대였다.

 프란치스코는 명랑한 성격으로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던 중,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투옥되기도 했고,석방된 후로는

오랜동안 중병에 시달리다가 회복한 이후로 점차 딴 사람으로 변하였다.

 젊은 프란치스코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그는 자신의 경박한 생활이 허무함을 깨달았다.
기도는 힘든일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비우도록 프란치스코를 이끌어 갔고
결국 길에서 만난 나병 환자를 말에서 뛰어내려 끌어안을 정도로 그를 변화시켰다.


가난한 이들 중에 그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대상은 나병환자들이었고 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결국 하느님께 대한 경외가 마음속에서 일어나

예전에는 쓰다고 느껴졌던 것이 영혼과 몸의 단맛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기도 중에 들은 것에 완전히 복종한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프란치스코야,네가 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네가 육신 안에서 갈망하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이 너의 의무이다.
 그리고 네가 이것을 시작했을 때 지금 너에게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던 모든 것이

 씁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피하던 것들 그 자체가 크나큰 감미로움과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는 스폴레토에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고 성다미아노에서

"내 교회를 고치라"는 말씀을 들었으며,
또한 나병환자와의 극적인 입맞춤을 통하여 지난날의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후 그는 성 다미아노에서 복음을 글자 그대로 살기로 결심했으며,
부친의 유산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보속 생활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1205년말, 나병환자를 만나고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해지던 해에,
황폐한 성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지어라. 나의 집은 거의 다 무너져 가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철저하게 가난뱅이가 되었고 비천한 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나의 집을 지어라."는 말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만 했다.


그는 남은 생애를 허물어져 가는 성 다미아 노성당과

천사들의 성마리아성당(포르치운쿨라)의 벽돌을 한 장씩 쌓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가난뱅이로 있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1206년 4월, 그는 자기 아버지(그의 아버지는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물건을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앞에서 옷까지 벗어 버림으로써 물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였으며

마침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아주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1208년 2월 24일, 포르치운쿨라성당에서 성 마티아 축일 미사에 참례하던 중
복음말씀(마태오 10,9-10)을 가난에 대한 계시로 알아듣고 그 말씀을 생활양식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 나라를 전하라. 너희 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도 가지지 말며
여행 가방도 신도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는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극도의 청빈생활을 시작함으로써

프란치스코회가 첫 발을 내딛게 했으며,
그는 수도원을 세울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자

이 수도원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법적 절차를 받아들였다.

 1209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프란치스코가 제출한 회칙’생활양식’이

너무나도 이상적이며 엄격하다하여 인가를 거절하였으나,
그날 밤 꿈에 쓰러져가는 라테라노 대성당을 작은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부축하여 세우는 것을 보고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교회를 쇄신 시킬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회칙과 회를 구두로 승인하였다.
그들의 본부는 아씨시 교외 산따 마리아 데글리 안젤리에 있는 뽀르찌웅꼴라 성당이었고,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 부터 이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 다니면서 형제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을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하였고, 극도의 가난을 살았고,움막에서 살았으며,
일을 하고 애긍을 청했으며,나병환자들을 간호하는데 헌신하였고,

마을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며, 교계의 진출을 사양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사제가 아니었고 다만 부제였다고 한다.

 프란치스코의 교회에 대한 헌신과 충성은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여러 가지 개혁 운동이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고 있던 당시에는 특히 모범적인 것이었다.
그는 기도에 완전히 헌신하는 생활과 복음을 설교하는 활동적인 생활 모두를 병행하다가

결국 복음 설교에 더 중점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언제든지 할 수 있을 때에는 고독한 기도 생활로 되돌아갔다.

 가난을 포옹하고 복음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만인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파했다.
제자들을 훌륭한 생활 양식으로 교육시켰고, 이 생활 양식을 사도좌가 인준해 주었다.
1217년부터 이 수도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하여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관구가 형성되고, 잉글랜드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다.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1212년에 그는 성녀 글라라와 함께 2회 "가난한 부인회" 일명 ’글라라회’를 창설하였으며
글라라는 가난을 잘 이해하였고 프란치스칸활동의 특별한 의미와 풍부한 통찰력을 가졌다.
그녀의 성소는 하느님과의 신비적이니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 생활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