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중국과 친해지기

그때는 중공이었는데... 격세지감

주님의 착한 종 2015. 9. 3. 08:56


한중수교 한 1992년에는 중국은 등소평 주석,한국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정부간 교류는 거의 없었지요.


당시,

중국인민들은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몰랐습니다.

북조선에 대비되는 남조선은 알았습니다만 북조선 만큼 그리 세세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외교적으로도 한미일 삼각편대와 북중러 삼각편대가 형성되어있어

남북 조선을 빼곤 상호간 대탕트 시절이었지요.


한국 대통령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관료나 일부 기업가외 일반 인민들은 모르고 있었으며 관심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중국이라는 이름보다 '중공'이 더 널리 알려져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재미있는것은 일반 기업가조차 남조선이 상당히 발전한 나라요,

삼성.현대라는 글로벌 기업이 있다라는  것은 알면서도

삼성.현대가 도데체 무슨 제품을 만드는지 오히려 민망해하며 넌즈시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붉은 단층집에 흰 벽이면 붉은 글씨로, 붉은 벽돌이면 흰 페인트로

벽 전체가 온통 전투적인 구호로 가득했습니다.

꼭 지금의 북한 거리를 보는 듯 했습니다.

북조선만 알고 있다가 남조선 사람들이 물밀듯이 들어오자

그때서야 남조선의 경제력이 오히려 북한은 비교 상대도 안되고

중국보다 더 선진국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 영향으로 남조선 손님들과 식사 한 끼 하는 걸 큰 자랑으로 여긴 시절이었습니다.

(여기서,흑묘백묘론은 원래 광동성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민간 숙어인데

등소평이 실사구시를 강조하고자 남순강화(南巡講話)시 차용해서

이를 국가적 이념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야,일반 인민들에게 남조선을 '한국'으로

한성을 '서울(首爾)'로 인식되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개명해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또 삼성은 반도체, 현대는 자동차라는 것도 그때부터 알기 시작했습니다.

반면에 북한은 '북조선'또는 그냥 '조선'으로 통칭하게 된 것입니다.



한.중간 정식 국교수교후 23년이 흘렀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1/4을 중국이 차지했습니다.

중국의 경제력도 일취월장하여 개인소득이 92년엔 불과 $200 하던 것이

작년엔 약 $7,500로 무려 38배나 성장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위주의 사회주의 체제이나 

이미 오래전부터 실질적 자본주의 체체로 변화되었습니다. 


북.중간 혈맹이 무너졌고, 한중간은 새로운 전략적 동반관계로까지 발전되었습니다.

복잡한 국제외교나 국익에 따른 이해타산은 차치하고라도

대한민국이란 국호와 한꾸어런(韓國人)이란 브랜드는

이미 중국 인민들의 뇌리에 깊숙히 각인되어 있습니다.

 

36년간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3년동안 전국토가 풀한포기 자라지 못할 정도로 파괴되었는데도

단시일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경이로울 정도로 뛰어난 능력과 부지런한 민족으로 말입니다.

 

냉전시대때 중국이 서방과 교류를 하면서 두명의 뛰어난 외교관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바로 '귀주 마오타이주(貴州 茅台酒)'와 '양산박과 축영대(梁山泊与祝英臺)'.

아마 우리의 지금 한류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20여년 전, 한중 관계와 지금의 한중관계.그리고,북중관계..

격세지감이 아닐수 없습니다.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은 몇년전에 이미 예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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