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오 하느님

2007년 10월 24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주님의 착한 종 2007. 10. 24. 08:06

 

1독서 : 로마 6,12-18

그러므로 결국 죽어 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맡겨서 복종하면

곧 자기가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종이 되어 죽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39-48

 

생각해 보아라.

도둑이 언제 올지 집주인이 알고 있었다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 오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주님, 지금 이 비유는 저희에게만 말씀하신 것입니까?

저 사람들도 모두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하고 묻자 주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어떤 주인이 한 관리인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느냐?

주인 돌아 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그 종은 행복하다.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은 때려 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 와서 그 종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처넣을 것이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몰랐다면 매맞을 만한 짓을 하였어도

덜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 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 놓아야 한다."

 

 

<세상이 그나마 견딜만한 것은>

 

일본의 한 생태학자가 일개미의 생태에 대해 세밀히 연구한 결과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개미 하면 근면한 동물의 상징으로 우리 머릿속에 인식되어 있지만,

사실 모든 개미들이 다 근면하지 않다고 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수많은 개미들이 다들 난리입니다.

뭔가 저마다 하나씩 뭔가 입에 물고 줄지어 다닙니다.

식량을 저장하기도 하고, 집을 짓기도 하고,

덩치가 큰 곤충과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바라보면 상황은 전혀 뜻밖입니다.

어떤 녀석들은 정신 없이 왔다 갔다 하기는 하는데 개미공동체를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폼만 잡고 있습니다. 뒷짐 지고 유유히 산책하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어떤 녀석들은 얄밉게도 하루 온종일 단 한 번도 개미집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고 안에서 빈둥거리기도 한답니다.

 

20%정도의 개미만이 죽을힘을 다해

개미공동체 그 많은 식솔들을 위해 전력투구를 한다는 군요.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는 인간 사회나 조직,

공동체 생활 안에서도 이런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를 일컬어 20:80법칙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억지로, 인위적으로 형성되기보다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할 삶의 논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동체 생활을 해나가는데 있어 어느 정도 참조할 필요도 있겠습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몫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그릇도 다릅니다. 역량도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공평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때로 엄청 불공평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면서

어떤 사람에게는 엄청난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가집니다.

 

“나는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하루 온 종일 뼈 빠지게 일만 하는데,

하루 온종일 빈둥거리는 저 인간은 도대체 뭐냐?

 

은근히 심기가 뒤틀립니다. 왠지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억울합니다. 가서 따지고 싶습니다.

일 좀 하라고 소리 지르고도 싶습니다.

 

절대로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웃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지 마십시오.

결국 남는 것은 상처요 실망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은 그에게 맡기고, 하느님께 맡기고,

그저 내게 주어진 몫만 바라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시킬 만 하니 시키시는 것입니다.

감당할만하니 짐을 지워주시는 것입니다.

 

때로 어쩔 수 없습니다.

언젠가 병들고 연로해져서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날,

꼼짝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게 될 그날,

아무도 우리를 불러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일도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이웃들의 지나친 요구 앞에서도

‘이렇게라도 나를 필요로 해서 불러주니 얼마나 고마운 가’

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한 인간을 생산능력, 필요성만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으로 인해

삶의 현장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기치 않은 병고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고로,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하는 노화로 인해

삶의 일선에서 물러서야 합니다.

 

그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몫까지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나마 견딜만한 것은

아직도 그 누군가의 짐을 묵묵히 지고 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서로를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서로의 짐을 기꺼이 나눠지고 가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