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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바오 총리는 쇼 그만하라"고 직격탄을 날린 중국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줘따페이(55세)연구원
“원자바오(溫家宝) 총리는 ‘쇼’를 하고 있다. 총리가 날마다 일반 국민들이 사는 곳을 뛰어다니며 여기 가서 울고 저기 가서 눈물을 흘리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된 것이 무엇이냐. 돼지고기 값과 부동산 가격만 폭등했다.”
지난 8월25일 북경(北京) 해정구(海淀区) 이화원로에 자리잡은 북경대학 자원(資源)호텔 3층 1308호에 10여명의 중국 학자들이 모였다. 좌담회의 명칭은 ‘당면한 이론과 실제형세에 관한 교류’였다. 이날 모임은 중국 지식사회에서 보수좌파 이념을 표방하는 것으로 알려진 오유지향(烏有之鄕·‘유토피아’를 의미)출판사에 의해 마련됐다. 좌담회 ‘참석자들은 현재 중국 내 각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활동 중인 현역 학자들. 이들의 발언은 좌담회가 열린 지 보름쯤 지난 9월13일 미국에 본사를 둔 인터넷 중문 뉴스사이트 두오웨이(多維)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원자바오 총리의 현장 방문은 쇼’라고 공격한 사람은 원 총리 산하 국책 연구기관인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의 줘따페이(左大培·55세) 연구원이었다. 그는 돼지고기 값 폭등과 관련, “국무원이 핑계만 대고 있다. 지난해 돼지고기 값이 폭락해 올해는 사육농가가 줄었다거나 돼지 청이병(중국에서는 籃耳病이라고 한다)이 돌았기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하지만 돼지고기 값이 떨어질 때 당신네 국무원 공무원들은 무엇을 했는가. 청이병이 나돌 때 마오쩌뚱(毛澤東) 시절부터 존재했던 정부의 수의(獸醫)체계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또 “국무원은 하루 종일 국유기업과 은행 팔아먹을 궁리만 하고, 통화팽창이 심각한데도 거시경제적으로 압력만 가할 뿐 조정할 줄 모른다”면서 “현 정부는 개혁 중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정책 노선은 완전히 틀렸다”고 비판했다.
북경대군(大軍)경제관찰센터의 리웨이(李偉) 연구원도 “국무원의 노선은 잘못됐다. 국무원의 많은 부처가 ‘종일토록 모여있어도 말하는 것이 의롭지 못하고 작은 꾀나 부리기를 좋아한다’(群居終日 言不及義 好行小慧/논어에 나오는 말)”고 공격했다.
이날 좌담회에는 이들 외에도 공산당의 이념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중앙정책연구실의 장친더(張勤德) 연구원을 비롯, 절강(浙江)대학 인문학원 예술과의 허칭(河淸·49세) 교수, 중국농업대학 허훼이리(何慧麗·36세·여) 교수, 시사평론가 궈송민(郭松民) 등 30대~50대 중진학자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대부분 공산당 당원들이다. 두오웨이(多維)뉴스 사이트는 “중국의 현 개혁정책에 대해 이처럼 맹렬히 공격한 사례는 일찌기 없었다. 특히 오는 15일의 중국 공산당 17차 당대회를 앞두고 원자바오 총리를 직접 겨냥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고 논평했다.
<중국 정부를 맹렬히 공격한 '유토피아 토론회'에 참석했던 중국 절강성 절강대학 허칭 교수>
현직에 있는 중국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최고 직속상관을 직접 거명해 비판하고, 세계가 놀라는 개혁의 성과에 대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질타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이 학자들은 앞으로도 무사할 수 있을까. 만약 노무현 정부하에서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이 총리의 행동을 “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면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중국 공산당 내 노선투쟁은 1921년 창당 이래 계속돼온 것이지만, 최근의 논쟁은 올 연초 한 학자의 글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개혁파(우파)로 분류되는 인민대학 시에타오(謝韜) 전 부총장이 연초 시사잡지 염황춘추(炎黃春秋)에 ‘민주사회주의 모델과 중국의 미래(民主社會主義模式与中國前途)’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구 소련 당 총서기 브레즈네프의 조카가 쓴 전기를 보면 그가 동생에게 ‘공산주의는 무슨 놈의 공산주의! 그것은 민중들이 와글와글대며 하는 헛소리일 뿐’이라고 말한 내용이 있다.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조차 공산주의 목표를 믿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엥겔스 역시 만년에 쓴 글에서 공산주의 모델을 포기했다”면서 “중국 공산당이 지향해야 할 길은 민주헌정과 혼합사유제, 복지제도, 사회시장경제를 갖춘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면서 “우리는 결코 장제스(蔣介石)가 걸었던 망국의 관료자본주의 길을 다시 밝아서는 안되며, 오직 민주헌정만이 근본적으로 집권정당의 부패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에타오의 글이 발표되자 중국의 지식계가 발칵 뒤집혔다. 보수파로 불리는 좌파 학자들이 들고 일어나 “사회민주주의 모델은 결코 중국이 앞으로 선택해야 할 길이 아니다”면서 시에타오의 주장을 반박했다.
중국대외연락부 연구실 주임을 지낸 인민대학 국제관계학원 우싱탕(吳興唐) 객좌교수는 올 4월 잡지 ‘당대세계(當代世界)에 발표한 글에서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신자유주의 사조 이후 ‘제3의 길’이란 명분으로 좌우를 초월한다는 목표를 내걸었지만, 결국 좌도 우도 아닌 모호한 정책을 내놓았고 중하층민들로부터 버림받았다. 그 결과 독일 사민당의 슈뢰더가 정권을 내놓게 됐다”면서 “우리는 선거를 통해 정권을 창출하는 유럽의 사회당 노선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이 실린 ‘당대세계’는 공산당 대외연락부가 주관하는 잡지이다. 이번 논쟁이 공산당 내부의 노선투쟁임을 보여준다.
또 지난 8월25일의 ‘유토피아 좌담회’에서 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의 장친더(張勤德)연구원은 “사회민주주의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엄격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공산당의 이념의 깃발을 잘라버리는 (우파의) 죄악에 대해 규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파 학자들이 원자바오 총리를 비판한 것이 알려지자, 네티즌들이 반격을 가했다. 이들은 “원 총리의 현장 방문은 인민의 아픔을 살피고 인민과 함께 하려는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며 “이를 폄훼하지 말라”고 공격했다.
최근의 논쟁에서 주목할 점은 60~70년대 중국 내 좌파들이 개혁-개방 노선 자체를 부정했다면, 지금의 좌파들은 개혁 개방의 대원칙은 인정하면서도 미국식 신자유주의 방법론(정책)에 대해 반대한다는 점이다. 가령 기업경쟁력만을 우선시한 국유기업 개혁으로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하는 것을 반대한다. 금융개혁을 한다면서 외국자본에 휘둘리는 것도 비판한다. 시장경제에 맡긴다는 명분으로 농축산물 가격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것을 방치하는 정부를 비판한다.
이들은 한국에서 70~80년대 박정희식 발전모델을 비판한 소위 ‘반체제 지식인’들을 연상시킨다. 중국 내 ‘반체제 지식인’의 등장은 중국 경제사회 발전의 결과이자, ‘더 이상 성장일변도의 발전은 곤란하다’는 지식사회의 한 흐름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지식계가 그랬듯이 이들이 중국의 정치변화를 이끌어낼 지가 주목된다.
중국 내 좌파들의 모임이 있은 지 약 한달 뒤인 지난 9월7~8일 염황춘추(炎黃春秋) 잡지사 사장이자 전 국가신문출판총서 서장을 지낸 두다오정(杜導正)은 홍콩에서의 강연을 통해 “좌파들의 비판 목소리는 크지만, 이들의 관점은 17차 당대회 보고에 단 한자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부적으로 사생결단의 논쟁을 벌이더라도, 외부적으로는 하나의 의견으로 통일하여 밀고 나가는 공산당 방식을 재확인했다. 중국 정치의 현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