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 누드 기사를 보면서 느끼는 소회입니다.
몇 해 전 일입니다.
모 일간신문에 여자교수의 의문사(疑問死)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젊은 연인들의 동반자살 기사가
같은 사회면에 위 아래로 붙어서 게재된 적이 있었습니다.
위의 것은 모 여대 총장의 장녀이며 그 대학 설립자의 외손녀인 교수가
내연의 남자와 낙산 비치호텔에 투숙 중 의문의 추락사를 한 내용이었고,
아래 쪽 것은 S대 의과대학의 2학년생이 수년간 교제해온 M전자의
근로자인 연상의 애인과 결혼 승낙을 받으러 집에 내려갔다가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유서를 남긴 채 두 사람이 저수지에 투신하여
동반자살을 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볼 쌍 사나운 것은 두 개의 사건을 같은 지면에 취급한
신문의 태도였습니다.
대학생 아들과 여고생 딸을 둔 어엿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호텔방에
같이 있다가 죽은, 냄새 나는 치정기사는 죽은 여자의 집안 내력까지
소상한 해설(?)을 곁들여가며 4단 기사로 큼직하게 뽑은 데 반해
의대생과 여성근로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본 기사가 아닌 주사위
난에 천덕꾸러기처럼 1단 기사로 조그마하게 처박혀 있는 것이
퍽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두 개의 기사를 싣기 위하여 할애된 신문지면이 마치 두 사건이 발생한
장소. 즉 풍광이 수려한 호텔과 인적이 드문 시골 저수지의 쓸쓸한
풍경을 대조하는 듯 했고,
그들이 살았을 호화로운 저택과 벌집이라고 불리는 공단 근로자의
숙소를 대조하여 연상케 하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했습니다.
매스컴의 속성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왠지 내 속이
답답하고 메스껍기가 짝이 없었습니다.
그날 그 사회면은 신문이 흔히 말하는 ‘알 권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순전히 데스크의 흥미위주, 즉 기사의 상업성 가치 때문에 그리 된
것이었습니다.
불륜사건은 크게 클로즈업시키고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휴지통에 버리듯 한쪽 구석에 처박은 그 신문의 데스크는
독자들이 젊은 연인들의 동반자살 쪽 보다는 여교수의 추잡한 의문사에
더욱 흥미를 느끼리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음으로써 문제가 완전히 끝나버린 자살사건 보다는
죽음으로써 오히려 문제가 발생한 의문사에 대한 사건의 연속성 때문에
독자들이 더 큰 흥미를 느끼리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속물근성에 젖은 대다수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그랬다고 할지라도 데스크의 저울질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독자들 중에는 오히려 메말라가는 사회에 한편의 순정소설을 보는 듯한
동반자살 얘기에 더욱 궁금증을 느끼는 다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려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그 또한 지탄을 면키 어려운
행위이긴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애달파 하며
스스로 죽음을 택한 그들의 아픈 얘기를 추적하여 감동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요?
더구나 두 연인이 한 쪽은 장래가 유망한 의과대학생이었고 한 쪽은
그늘에서 소외되어온 공단근로자 간의 비극적 사랑이라면
이 참에 우리 사회의 잘못되어진 관념, 즉 학력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또한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관념을 깨뜨려줄
좋은 모티브가 될 수도 있었지 않겠습니까?
신문사도 물론 기업이니까 이윤추구가 기업의 목적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일반 사기업과 공기업이 다르듯이 정론 직필을 통해서, 바르게
가는 사회를 지향해야 할 신문이 흥미위주의 상업주의에 젖어
언론기관의 기능과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서 ‘알 권리’를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서는 이 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때 TV에서 9시 시계바늘이 맞춰지고 땡 하고 뉴스가 시작 되면
“전두환 대통령은...”하고 나오는 바람에 그 시대를 가리켜 ‘땡전시대’라
불렀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 당시 해외근로자로 나가있던 저는 미국의 소리(VOA)나 외국방송,
그리고 외국신문을 통해 국내정세를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었는데
3일 지나서 받아보는 한국에서 오는 신문에는 국내 정세에 대한 기사는
별로 없고 오직 제비족 이야기만 1주일이 멀다 하고 실려 있었습니다.
신군부 초기에는 언론에 재갈을 물렸던 5공 정부가 연리 5%가 안 되는
저리의 경협자금을 일본에 빌려와서 언론사에 빌려주면서,
그때부터 당근을 먹은 신문들이 스스로 입을 다물고는 룰루랄라 3S라하여
sex, sports, speed에만 치중하여 계획적으로 국민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중동 기술자의 아내를 잡아먹은 제비이야기로 지면을 채웠던
것입니다.
그 시절 나처럼 해외에 나가 있는 근로자들은 한국 신문에 이를
갈았습니다. 설령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드라도 먹고 살기 위해 아내를
고국에 두고 해외까지 나와서 땀 흘리며 일하는 근로자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었다면 신문쟁이들이 그런 기사를 그렇게 자주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이 사회를 바로 가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오늘과 같은
어지러운 세상을 만드는데 매스컴의 역기능을 가지고 일조를 했음을
깊이 회개하지 않으면 언론기관 자격이 없습니다.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입법기관인 것처럼 기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언론기관이라고 하여 나이가 많은 선배 편집국장님한테도 ‘국장님’의
‘님’자 호칭을 안 붙이는 기자님들이 아닙니까?
기자들이 각각 언론기관으로서 스스로의 사명을 다하면서 존엄성을 찾지
않는다면 국민이 언론을 외면하는 날도 올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며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고 이제는 결코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던 신문들이
계속 이런 식으로 상업성에 빠져서 저울질을 잘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바담 풍’하면서 독자들에게는 ‘바람풍’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거기다가 이제는 언론사가 특목고며 학원까지 운영하겠다고 나선다니
이러다가는 거대한 언론재벌이 나라를 통째 운영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양심적인 기자들이 말하더군요.
앞으로 신문 편집에 종사하는 사람들,
특히 우리 가톨릭신자 언론인들만이라도 세상얘기를 저울로 달 때
저울추를 이 세상의 추하고 악한 쪽보다 아름답고 따뜻한 쪽에
한 눈금을 더 주고 다는 그런 시각을 가지고 신문을 만들어 주시기를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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