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보부상 '다이공의 애환'
|
다이공(帶工_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면세품이나 농산물 등을 소규모로 거래하는 보따리상)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의 애환과 서정이 궁금해 평택항을 찾은건 지난 16일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한 여정은 팍팍한 현실이 주는 고단함이 동행했다.
# 평택항
평택항에 도착하면서 즉시 사라진 것은 여행에서의 ‘설렘’이었다.
# 평택항
평택항에 도착하면서 즉시 사라진 것은 여행에서의 ‘설렘’이었다.
평택항은 여정의 출발점으로는 매혹적이지 않았다.
대합실은 온통 어두운 복장에 갇힌 중년의 고단한 일상이 있었다.
여행의 설렘은 어디에도 없었다. 평택항을 생활의 텃밭으로 삼고있는 사람들,
이들을 선숙자(船宿者)라 불렀다.
하루 300~350명에 달하는 이들을 떠나보내고 맞는 이는 대룡해운의 A이사.
하루 300~350명에 달하는 이들을 떠나보내고 맞는 이는 대룡해운의 A이사.
벌써 5년이 됐다. 그래서 A씨에게 평택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거칠고 험하다는 다이공들을 상대로 이제는 언제나 웃으면서 이들을 맞고 또 보낸다.
“5년전 처음 왔을 때의 생경함이 이젠 전혀 없습니다.
“5년전 처음 왔을 때의 생경함이 이젠 전혀 없습니다.
이들이 꼭 그렇게 거칠고 사나운 것만은 아니예요.
나름대로 살갑게 정을 붙이는 사람들도 있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싶은 마음들이 저들에게 통했나 봐요.
형, 아우하며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면서 또다른 시각을 갖게되는 거죠.
점점 세월이 나빠지긴 하지만 오히려 대룡호에는 또다른 질서가 잡혀가고 있습니다.”
# 선숙자 혹은 보따리상
# 선숙자 혹은 보따리상
말이 좋아 소규모 무역상이다. 1990년부터 소수의 보따리상은 있었다.
한중 교류의 첫 시발을 알린 자생 무역업자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 `웬수'같은 IMF로 인해 보따리상은 급증하게 된다.
그러던 것이 그 `웬수'같은 IMF로 인해 보따리상은 급증하게 된다.
언론에서는 이들을 개미군단이라 불렀고 일부 대학에서는
소규모 무역상을 배출하기 위한 일정기간의 교육제도도 만들어 놓았다.
이른바 `소규모 무역상 장려정책'으로 이들의 첫 거래는 시작된 것이다.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소규모 무역은 최대 4천500여명에 이를 정도.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소규모 무역은 최대 4천500여명에 이를 정도.
이들의 고된 운항을 놓고 여행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말장난일 뿐이다.
그렇게 4천500여명이 복대기치던 그 시절이 오히려 좋았다.
2006년 지금, 보따리상은 2천여명. 그새 절반으로 줄었다.
다이공 최태용씨는 대룡호 최고참에 속한다. 보따리 상인 모임인
다이공 최태용씨는 대룡호 최고참에 속한다. 보따리 상인 모임인
소규모무역상연합회장을 지냈다.
1992년부터 배를 탔으니 벌써 15년째 배를 타고 있다.
요즘은 힘에 부친다. 월 3~4항차가 고작이다. 그래서 ‘수입’이라기보다는
그저 ‘소일거리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다.
“우리 소무역상인들은 10억달러에서 15억달러까지 수출을 했습니다.
“우리 소무역상인들은 10억달러에서 15억달러까지 수출을 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우리 정부에서 단속이 시작됐어요. 당연히 물량이 줄었지요.
그런 우리 분위기를 알아챈 중국에서는 한술 더 떠 무역 보복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 이전에는 손이나 밀차로 운반하는 공산품에 대해 전량 면세 통과를 해주던
중국에서 전부 세금을 받겠다고 나선 겁니다.”
# 개미군단
중국의 변두리 혹은 중국의 인접 국경까지 물류를 유통하고 있는
# 개미군단
중국의 변두리 혹은 중국의 인접 국경까지 물류를 유통하고 있는
상인은 우리나라 소무역상들 밖엔 없다.
20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퇴직한지 3년만에 퇴직금을 포함한 전 재산을 날렸다.
원래 유통업을 구상했던터라 자연스럽게 평택항을 찾게 되었고 이제는
빼도박도 못하는 어정쩡한 보따리상이 되었다.
이씨는 한 달에 열번 배를 탄다. 선실내 식당에서 밥 사먹고 어쩌고 하면 한
이씨는 한 달에 열번 배를 탄다. 선실내 식당에서 밥 사먹고 어쩌고 하면 한
달 순수익은 30만원 안팎이다.
“정말 딴 짓 안하고 오롯이 두 끼 밥만 사먹는 겁니다.
그래도 배 삯 내고 어쩌고 하면 실제 수입은 그럴 수 밖에 없어요.
” 배를 처음 탈때 투자한 비용(비자, 여권, 가방 등)을 뽑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시장경제 체제로 돌아서면서 보따리 무역은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시장경제 체제로 돌아서면서 보따리 무역은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사정이 나빠졌다.
한·중 카페리 노선 12개 지역에 보따리상과 함께 생활하는
중국인이 100만명을 웃돈다고 한다.
그들 역시 쇠락의 길을 걷기는 마찬가지. 이들은 한국의 현재 무역상 규제 실태를
`한국무역쇄국정책'이라면서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출처 : 보따리 클럽
글쓴이 : 장사치 원글보기
메모 :
'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 > 중국과 친해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중국 유행어 (0) | 2007.03.30 |
---|---|
[스크랩] [외부칼럼]베이징에서 무일푼 창업 일화 (0) | 2007.03.30 |
[스크랩] 사건사고 예방...이렇게 (0) | 2007.03.16 |
[스크랩] 中 첨단기술 국가 ‘야심’ (0) | 2007.03.15 |
중국에서의 변천과정 그리고 살아남기 (0) | 2007.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