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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4월24일)

주님의 착한 종 2022. 4. 24.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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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4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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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너희와 함께

 

 

어제 아침에 4차 백신을 접종했습니다.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더니

주사 맞은 부위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네요.

아직 코로나에 걸리지 않으셨다면

접종을 계속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 *

 

장례 미사 때,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것이 맞느냐

나누지 않은 것이 맞느냐?

한동안 설왕설래 할 때가 있었지요.

정답은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것이 맞습니다.

 

오늘 영흥성당 교우의 장례미사에서

송재훈 본당 신부님이 미사에 참석하신

교우분들에게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신 후

인사를 나누게 하시더군요.

 

송 신부님은 인천교구 연령회연합회

전임 지도 신부님이기도 했습니다.

 

인천교구에는 12개의 지구가 있는데

저희 본당은 시흥안산지구에 속해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시흥안산지구에는 대부도와

영흥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농어촌이 다 그렇듯

대부도나 영흥도에도 젊은이들이 별로 없습니다.

노인들만 남아 뱃일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살고 있는데, 혹시라도 중병이 들거나 하면

섬에는 병원이나 큰 의료시설이  없으니

시흥이나 인천 서울 등지의 병원으로 모시게 되고

그곳에서 임종을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섬과는 거리도 멀고, 연령회원들은 연로하시고..

그럴 때 가톨릭의 공동체 정신이

큰 힘을 발휘합니다.

지구에서 협력하여 함께 장례를

치르고 있으니까요.

 

또 어느 본당의 연령회장님이나

선종 봉사회원 단체에 사정이 생겼을 때도

여유가 있는 다른 본당들의 회원들이

대신 장례 봉사를 하기도 하고

함께 참석해서 고인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는 시흥안신지구의 이런 면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어제는 영흥성당 교우분의 입관과

장례미사에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출관, 발인 예절을 하러 가려 합니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대단하였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자비입니다.

자비주일이니까 당연하겠지요?

 

하느님께서 초대교회 공동체에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주님을 믿는 신자들의 수효가 날로 늘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참 생명을 얻도록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맨 마지막 부분,

요한 20,19-31입니다.

 

의심 많은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께 핀잔을 듣는

내용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복되다”라는

말씀으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에서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에서의

믿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두 믿음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 문장에서 사용한 믿음의 의미는

사실 믿음이라기보다는

단지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네요.

 

토마스 사도처럼 실제로 못 자국이 있는

예수님의 손바닥과 상처 난 옆구리를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한 경우에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확인’하였거나

알아차린’것이라고 할 수 있을 따름이지,

결코 믿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인식의 결과일 뿐이지

믿음의 결과라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에서의 믿음이란

진정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의 믿음은

감각과 지각의 영역을 넘어선

순수한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때의 부활은 순수한 믿음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주님께서 오감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시는 까닭은

우리가 진정한 믿음으로써 당신을 알아보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곧, 우리 눈앞에 당신이 나타나시거나

실제로 당신의 목소리를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이미 믿음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인식의 대상으로밖에

주님을 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진정한 믿음을 통하여

당신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보지 않고도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의심 많은 토마스를 통하여

당신의 부활을 확실하게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런 면에서 토마스는 큰 공헌을 했지요.

비록 후대 사람들에게 의심 많은 사람이라고

평을 받기는 하지만..

 

성경에는 토마스가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넣어 확인했다는 말씀은 없지만

토마스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부르며

고백하는 멋진 기록영화를 만들게 한 셈입니다.

아무튼 대단하신 예수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