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2022년04월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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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4월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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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만 해도 보이지 않던
벚꽃이 피어나고 있네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혹독한 겨울 추위와 가뭄이 지속되었어도
봄은 어김없이 사뿐 사뿐
발소리를 죽이며 오는 것 같더니
웬만큼 때가 되었나요?
이제는 보란 듯 성큼 성큼 다가옵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 이라 했습니다.
이제 곧 정권을 이양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문제인 대통령의 심경은 어떨까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귀에 새겨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개인적 야망이 워낙 커서
오랜 기간 권좌를 차지하고도
약한 나라를 침략하는 푸틴도
언젠가는 초라한 모습으로 주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장래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제발 한 번만이라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지방에서 변호사를 하는
절친이 있습니다.
고향이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방인
경상북도 봉화란 곳입니다.
나중에 한 번 가 보십시오.
우선 공기가 다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울창한 아름드리 나무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곳입니다.
정말 벽촌이지요.
이 산골에서 사시에 합격하다니..
옛날 같았으면 직급이 군수영감 아닙니까?
그 동네에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었답니다.
친구의 부모님은 아들이 돌아오는 날
마을 잔치를 벌였지요.
그 친구가 집에 들어서자
동네 어르신들이 박수를 치고 환영을 하는데
어느 할머니 말씀이…
“아니, 저 놈은 감 나무집 이씨 큰 아들 아녀?
난 대단한 사람이 오는 줄 알았네..”
하시더랍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 7,40-53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데에는 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고정관념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위의 할머니에게는 20대의 검사나 군수영감도
감 나무집 이씨의 큰 아들녀석 뿐인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유다인들에게는
갈릴래아의 어느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던 것이었지요.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럴까요?
하느님의 선택이 어떤 지역에
한정될 수 있는 일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어느 땅, 어느 사람이건
예언자로 선택하실 수 있으신데요.
그러니까 이것은 믿음의 근본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이들은 함부로 말을 합니다.
그 이유도 있답니다.
역사서를 보면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갈릴래아는 북쪽이고,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남쪽입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아무래도
이스라엘의 중심축에 있다 보니
문화적으로 차이가 생기면서
남쪽은 우월감을 갖게 되었답니다.
그러니 예언자가 북쪽에서 나온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유치한 생각에 젖었겠지요.
특히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주변 국가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작습니다.
그러므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일치뿐인데
그걸 잊고 있습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동 아시아에서 한국보다 작은 나라가 있나요?
일본이 작나요?
중국이 작나요?
인접한 러시아가 작나요?
하나로 뭉쳐야 하는데
정치인들이 편가르기를 하고
그나마 반쪽만 남은 이 땅을
다시 동서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습니다.
어떤 지도자건 우월감만을 내세운다면
카리스마를 지닐 수 없습니다.
(아, 참…
원래 카리스마라는 단어는
하늘의 기운이라는 뜻입니다.)
남을 인정해야 안목이 넓어집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면 남을 부정하게 되며.
자신의 생각만을 끌어안고
양보하지 않으려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월하다고 착각할수록 그만큼
어리석음만 깊어지지 않겠습니까?
이웃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없는
우리들 자신만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