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2022년04월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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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4월01일)
어제 산행을 하다 보니
산 꼭대기 옆 계곡 쪽에 진달래 꽃이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봄은 이미 소래산 꼭대기까지 와 있군요.
아, 그렇구나.. 3월의 마지막 날이었구나.
어쩌다 보니 달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4월이 되면 TS 엘리엇의 시가 생각이 납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까?
어떤 분들은 혹독한 겨울을 땅속에서 견디며
씨앗을 움트고 새싹을 피우기 위해
땅밑에서 애썼을 씨앗들을 생각했고
어떤 분들은 새싹들이 그 여린 잎으로
딱딱한 대지를 뚫고 나오느라
얼마나 고통이 심했을까 생각하니..
그래서 4월은 잔인하다고 했다지요?
예 그렇군요.
두 가지 의견에 모두 동감합니다.
또한 가톨릭 신자들에게 4월은
긴 시간 동안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느라
제법 힘들었을 터이니
부활 전까지의 4월은 잔인하다고 해도 될까요?
아무튼 새싹이든 라일락 꽃이든 천주교 신자든
그 고통을 이겨내었기에
온 세상을 연두색 평화로 물들이고
아름다운 봄 꽃으로 피어내며
부활의 감동을 마음에 물들여준 4월이
우리에게 축복의 달임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지혜서 2,1ㄱ, 12-22입니다.
구약성경 중 마지막으로 쓰인 지혜서는
주전 5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희랍어로 집필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헬레니즘의 문화에 접하며
신앙에 큰 위협을 받습니다.
인생은 잠깐 사이에 지나가기에
현세에서 온갖 쾌락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희랍 사상에 대해 지혜서의 저자는
이스라엘 전통 사상을 후세들에게 교육합니다.
오늘 지혜서가 들려주는 충고는 이렇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악행을 저지르게 되고 그래서 악인이 된다.
올바른 판단은 지혜로부터 온다.
지혜로운 사람은 올바른 말과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고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만 하게 된다.
오늘 복음은 요한 7,1-2, 10. 25-30입니다.
복음 묵상에 앞서
어느 운동 선수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습니다.
예전 70년대 초반에 고려대학교에는
세 사람의 걸출한 스포츠 스타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신동파 선수와 쌍벽을 이룬
농구의 박한 선수였고
다른 두 사람은 박한 선수보다
몇 년 후배였는데
그중 한 사람은 당시 최고의 축구 스타
차붐.. 차범근 선수였습니다.
또 한 명의 스타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이미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그 선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한 시골뜨기 무명 수영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영에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지만
제대로 된 강습이나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처음으로 유명 대회에 참가하여
경기 전 자신이 평소 하던 대로
준비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이를 지켜보던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그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생김새도 그렇고 영락없는 촌뜨기의
준비 운동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경기 결과, 정말 예상 밖으로
이 무명 선수가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그 뒤로 많은 선수가 이 무명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다음 경기부터는 다른 나라 선수들까지
이 선수의 준비 운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선수가 이 준비 운동을
꽤 권위 있는 준비 운동으로 채택하여
실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무명의 선수가 바로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었지요.
조오련이 촌뜨기라서
처음에 인정은 커녕 비웃음을 산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박해를 받았던 것도
한마디로 촌뜨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떠들면서
예수님의 출생과 신분을 보아
분명 메시아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언제 자신들의 무지를 깨닫게 될까요?
이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 하지만
그래도 주민들 가운데에는
믿음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메시아가 오더라도 저분이 일으킨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일으키겠는가?’라는
이러한 분위기가 퍼져 나갔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피부에 와 닿으면 받아들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민중을 외면하면
누구도 성공할 수 없고 힘을 쓸 수 없지요.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민중을 가까이 하지 않고 어떻게
주님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을까요?
사랑이지요, 따뜻함입니다.
민중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그분의 따뜻함과 사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병자들을 낫게 하고
가난한 이들이 희망을 갖게 하며
지도자들이 외면하고 죄인 취급하는 이들을
친구로 받아 주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결코 대가를 요구하시거나
부탁을 강요하시지도 않으셨지요.
그분의 따뜻함이 모든 것을
뛰어넘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