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2022년01월15일)
오늘의 묵상(2022년01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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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시겠지만 견원지간(犬猿之間)은
개와 원숭이 사이라는 말이지요.
(요즘 젊은 세대들은 한자(漢字) 교육을 받지
않아 잘 이해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견원지간은 좋지 않은 관계일 때
이 비유를 많이 사용하는데,
실제로 개와 원숭이는 잘 지내지
못한다고 하네요.
제가 보기에는 개와 고양이가 그렇던데..
동물 학자들의 설명을 들으니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올립니다.
이것은 잘 아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원숭이는 내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분이 상하면 원숭이는 꼬리를 올리고,
개는 내린다는 겁니다.
신호 체계가 정반대인 셈이지요.
자신의 신호 체계로 상대를 보니까
오해는 당연하겠지요?.
관계가 나빠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원숭이와 개 사이의 불화는
‘숙명’이라고 해야 되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시각만 바꾸면 견원지간의 관계에도
변화가 가능하겠지요.
자신의 입장에서 보던 것을
상대 입장에서 보려는 노력을 한다면요.
그런데 요즈음 정치판을 보면
여야를 막론하고
견원지간도 그런 견원지간이 없습니다.
아예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 같아
뉴스 보기가 싫습니다.
속도 거북해지는 것 같고..
시각의 차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항의합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그들은 여전히 율법의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사랑의 시각으로 보십니다.
세리도 주님의 자녀라는 관점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반대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부유한 집단이었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율법을 저해하는
힘으로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는 것이
못마땅할 수 밖에요.
율법에는 죄인과 어울리면 함께
부정해진다고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구애 받지
않으실 뿐더러 오히려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기까지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레위 말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마태오라고 나오지요?
(마태 9,9-13을 읽어 보세요).
그러니 아마도 마태오는 두 이름을 가진 듯합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현재는 귀하고 천한 구분이
많이 사라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여전합니다.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겠지요.
저는 생각합니다.
남을 괴롭히는 일이 아니면
모두가 당당한 직업이라고..
예수님께서 율법에 억매이지 않으신 이유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보셨던 것 아닐까요?
그러기에 당시 사람들의 편견을 뛰어넘어
세리를 제자로 삼으셨을 것입니다.
그들과 어울리는 자체를 부정한 행위로
간주하던 때였는데도 말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부와 명성과 자신의 업적과 치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 했으니
당연할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삶의 근본을 망각한다면
어리석은 행동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저는
부도, 명성도, 업적도, 치적도 남길
능력이 안 되는 소시민이다 보니
마음 편하게 이렇게 지껄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 편하다고 할까요?
주말에는 잠시 기온이 풀렸다가
월요일부터 다시 초강력 한파가 몰려오고
눈도 만만치 한게 온다는 예보이니
운동도 많이 하시고
좋은 것도 많이 드셔서
체력 보충을 많이 해놓으시면 봏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