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2021년10월13일)
오늘의 묵상(2021년10월13일)
聖 김 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오늘 복음은 루카 11,42-46 입니다.
어제 말씀 드린 대로
오늘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에 대해
예수님은 가혹하리만치 비난을 하십니다.
동창 중에 이런 친구가 있습니다.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그 친구는 자리를 가로막고 그 당사자들 앞에서
싸놓고 비난을 해댑니다.
그 친구의 비난은 사실 다 맞는 말이고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친구는 그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의 역할을 거의 다 한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결정적인 파국이 발생했을 때에는
정말 기적처럼 그 자리에 없는 거에요.
지금 생각해 보아도 처신의 달인이라 할까요?
정말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 없습니다.
인간 카멜레온..
예, 존경하리만치 대단한 변신술의 달인이었습니다.
갑오시끼란 말 아세요?
나쁜 일본 말이니까 쓰면 안 되지만
저희들 어렸을 때는 많이 쓰던 발입니다.
요즘은 N분의 1이라고 하지요.
아무튼 어떤 일이 생기면 교묘하게
나중에 나타나서 중재를 하고
화해의 자리를 갖게 되는데
이 친구가 주장하는 것이 갑오시끼입니다.
그런데 정작 계산을 할 때 쯤이면
이 친구는 보이지를 않네요.
갑자기 설사가 나서 화장실에 가거나
깜빡 잊고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거나..
나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아니면 직장생활을 하고 난 후
친구들 모임에 그 친구를 보기 힘들었습니다.
아무도 그 친구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거든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즐긴다고 꾸짖으십니다.
아니, ‘불행하다’고 직격탄을 날리십니다.
그런 행동이 왜 불행한 것이 될까요?
‘하찮은 것’에 매달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리에 연연하고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 한다면
그 직책에서 ‘물러서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평하는 율법 교사에게는 분명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복음적’이지 않은 것은
우매한 우리들도 다 알지 않습니까?.
재산의 ‘십분의 일’을 바치고
평생 남을 위해 헌신했더라도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면목과
영달을 위해 했다면 ‘
그저 그런 일’로 남게 되겠지요,
지긋지긋한 한국의 정치인들처럼 말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완벽한 준수를 위해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았답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살도록
이론적인 뒷받침을 해 주었고요.
그들은 사명감을 갖고 그렇게 살았는데
하지만 사랑이 없었기에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꾸중을 듣는 일이 되고 말았지요.
누구나 명령하고 지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힘이 실리겠습니까?
주님께서 힘을 주실까요?
봉사하는 입장에서 늘 이야기 합니다.
교회 일은 관리자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언제나 말 그대로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봉사를 망각하면 누구나
‘현대판 바리사이’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제 가슴이 뜨끔한 이유는????
그저 주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일까요?
제가 쓰는 매일의 묵상글은
제 자신에게 타이르고 질책하는 글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